이북 지방 전도여행을 떠났던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조선 정부의 금교령이 내려진 후 바로 서울로 돌아왔다. 가톨릭 선교사와 다르게 개신교 선교사의 이 같은 순응은 조선 정부에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선교가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펜젤러는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무렵 배재학당에서는 가장 우수한 학생 4명이 자발적으로 친구들을 전도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한 학생은 4명의 친구를 전도했다. 다른 학생은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경험을 겪기도 했다. 나머지 학생은 마을에서 전도하다 여관에 들러 머물고 있었는데 포교를 한다는 이유로 갑자기 수령의 병사들이 들이 닥쳐 이들을 잡아가고자 하였으나 여관 주인이 병사들에게 이들을 고발하지 않고 대신 매를 맞고 돈을 주어 무마시켰다.
이러한 학생들의 신앙 체험은 아펜젤러에게 크나큰 감동을 주었다. 조선 정부의 금교령으로 선교가 금지되었던 상황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고, 미약하게만 보였던 한국 학생들이 직접 복음을 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아펜젤러는 이들의 행동을 자신의 일기에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선교하여 매우 고무적이었다”고 기록했다.
조선 정부의 금교령 결과
1888년 5월 금교령 시행 후, 베델 예배당은 폐쇄됐고 이후 예배당을 다시 사용할 수 없었다. 사정이 좋지 않은 가운데 예배당 사용을 강행한다는 것은 선교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의 민심을 누구보다 잘 파악했던 아펜젤러는 개신교 예배당이 금교령의 주된 표적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가톨릭 선교사의 명동성당 건축처럼 무리수를 두어 한국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대신 임시 예배 장소로 그의 주택과 외국인 연합교회를 이용하였다. 그리고 여신도들은 이화학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눈에 보이는 베델 예배당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음 선교가 아펜젤러에게는 무엇보다 우선 순위였던 것이다.
아펜젤러의 판단은 오늘 우리에게 적잖은 교훈을 주고 있다. 아펜젤러는 교회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예배당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예배당 밖의 한국 민심이 곧 선교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 점은 오늘 한국교회와 해외 선교사들이 귀담아 들을 부분이다.
영아소동
아펜젤러가 동역자들과 선교의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며 한국의 민심을 살피고 있을 무렵 개신교 선교는 또 한 번의 위기를 맞는다. 그것은 1888년 6월에 있었던 영아소동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수구파였던 사람들이 기독교의 정착과 근대화를 염려하여 퍼뜨린 소문이었다. 영아소동은 서양의 선교사들이 어린 아이를 잡아먹고 눈은 사진기 렌즈로 쓴다는 해괴한 소문이었다.
우스운 소리 같지만 당시 한국 사회는 서양인을 ‘양이(攘夷)’라고 생각하였던 터라 민중에게 의심을 살 수 밖에 없었고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민중들은 아펜젤러의 배재학당, 스크랜턴 대부인의 이화학당, 스크랜턴의 시병원 등 외국 선교사들의 건물로 몰려가 아기를 내놓으라고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은 시위대의 손에 이끌려 나와야 했다.
상황은 매우 심각하게 변해 해외 선교사들과 외교관들은 미국 러시아 프랑스 등 자국 공사관에 보호를 요청하였고 조선 정부는 선교사와 외국인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다. 조선 정부는 “이러한 소문은 거짓이며 근거 없는 소문을 내는 자는 잡아들일 것” 라는 방까지 붙여 사태를 수습해 나갔다. 하지만 소문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조선에 전염병이 돌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됐다. 선교사들과 한국 기독교인은 외면하지 않았고 민중에게 다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병을 치료했다. 민중들은 이들이 몸을 아끼지 않고 진료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게 되었고 영아소동으로 격앙됐던 감정도 누그러졌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예수님의 정신이 실현되어 외국의 선교사와 민중들은 이전보다 더욱 깊은 신뢰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한반도 순회 선교의 시작
중단되었던 내지 순회선교는 재개되었다. 1888년 10월부터 이북 지역을 시작으로 1889년 3월까지 내지 선교를 위해 한반도 전체를 순회하였다. 순회 거리는 대략 2945㎞. 거리만으로도 선교를 위해 얼마나 헌신하였는지 짐작이 간다.
10월부터 시작된 순회선교는 해주를 비롯한 이북 지역뿐만 아니라 이남 지역까지 거쳤는데 1889년 2월에는 공주, 8월에는 대구를 거쳐 부산을 방문하였는데 전국 8도 가운데 6도를 방문하였다. 순회 선교의 결과는 27명에게 세례를 주어 결신자를 양성하였고 예비 신자는 29명이었다. 예비 신자 가운데서 2명의 정교인을 받았다.
당시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마을 공동체의 전통과 관습 중 상당 부분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크리스천들은 일상생활에서 크고 작은 박해를 각오해야 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남들보다 부지런히 일을 하더라도 손해를 감수해야 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남들보다 더 바르게 살아야 되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44명이나 되었다. 사망이나 이주 등 불가피한 사항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처럼 신앙의 선조들이 일구었던 수많은 희생은 오늘 우리가 마땅히 기억해야 될 신앙의 유산이며 계승해야 될 귀한 가치이다. 교회의 역사를 통해 주는 교훈을 기억하며 우리가 누구인지 정체성을 발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소요한 명지대 객원교수·교목
[한국 근대교육 선구자, 아펜젤러] (12) 조선 정부 금교령과 한국 선교
입력 2015-02-03 0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