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백남준 10주기… 세계가 그를 주목하는 이유?

입력 2015-02-02 02:05
백남준의 작품세계와 그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는 전시가 풍성하다. 백남준의 TV로봇 시리즈 하나인 ‘톨스토이’((1)·학고재 갤러리 ‘W3’전), TV모니터가 캔버스를 대체할 거라는 주장을 담은 백남준의 ‘퐁텐블로’((2)·백남준아트센터 ‘TV는 TV다’전), 토종 비디오아티스트 박현기의 ‘낙수’((3)·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박현기(왼쪽)가 1985년 일본 가마쿠라화랑에서 가진 자신의 개인전을 찾은 백남준(왼쪽 두 번째)과 얘기하는 모습((4)). 국립현대미술관·백남준아트센터·학고재 갤러리 제공

금색 도장을 한 화려하고 고풍스런 나무 액자 안에 컬러 모니터 20대가 격자무늬처럼 배치돼 있다. TV모니터에선 추상 이미지들이 빠른 속도로 바뀐다. 작품 제목은 '퐁텐블로'. 나폴레옹을 비롯한 프랑스 왕이 머물렀던 이 성에서 갤러리의 원형이 탄생했다. 비디오아트의 창시자 고(故) 백남준(1932∼2006)은 TV수상기가 캔버스를 대체하는 시대가 올 거라는 걸 이 작품을 통해 웅변했다.

내년 10주기를 앞둔 백남준에 세계가 새삼 주목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 뉴욕 록펠러재단 아시아소사이어티 개인전에 이어 영국 테이트모던에서도 현재 전시가 열리고 있다. 내년 한·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맞아 파리시립미술관도 전시를 추진 중이다. 때마침 국내서도 백남준의 예술세계와 그가 끼친 영향을 엿볼 수 있는 전시가 있다.

◇백남준의 ‘TV는 TV다’+‘W3’전=TV는 백남준에게 쓰임새가 다양했다. 캔버스나 감각적 실험 도구가 되기도 했고, 로봇과 악기를 만드는 재료로 쓰이기도 했다. 실험TV 시리즈에서는 자석, 전류, 음향 신호 등을 이용해 화면을 변형시키며 역동적인 컬러 패턴을 만들어 냈다. 그는 첫 개인전인 1963년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에서 이런 실험TV를 선보였다. ‘TV부처’ ‘스위스 시계’처럼 관객을 화면에 끌어넣는 작품은 그가 예술소비자를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게 한다. TV로봇, TV악기 시리즈에선 TV 그 자체를 신체의 일부로 삼거나, 신체 일부처럼 환경에 반응하게 했다. 백남준의 다채로운 TV사용법은 경기도 용인 백남준아트센터에서 6월 21일까지 개최되는 ‘TV는 TV다’전에서 볼 수 있다. 서울 중구 삼청로 학고재 갤러리에서도 백남준 개인전 ‘W3’전을 마련했다. 이곳 전시는 3월 15일까지다.

◇백남준이 아낀 토종 비디오아티스트 ‘박현기’전=백남준은 외국에서 주로 활동하며 1984년에야 한국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에 반해 열 살 어린 박현기(1942∼2000)는 70년대 말부터 당시 국내에선 생소한 장르인 비디오 작업을 시작했다. 74년 대구 미국문화원 도서관에서 백남준의 첨단 비디오작품을 보고 영감을 얻은 그는 79년 일본으로 건너가 미디어아트를 배웠다. 85년 일본 가마쿠라현 가마쿠라 화랑에서 가진 개인전 개막식에는 백남준이 직접 참석해 축하했다. 전시에는 현대미술의 또 다른 거장 이우환도 다녀갔다. 90년대 들어 한국에서도 비디오아트 열풍이 일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그는 2000년 위암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다. 선구적 토종 비디오 아티스트의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다. ‘박현기 1942-2000 만다라’전에서는 백남준에게선 맛볼 수 없는 동양성이 느껴진다. 대리석 위에 물의 영상이 흐르는 ‘물 벤치’는 거기 앉아있으면 시름이 잊혀지고 내면을 성찰하게 될 것 같다. 정신없이 바뀌는 백남준 영상과 달리 박현기의 영상은 느려서 편안하다. 전시장에는 평생 모은 돌들을 흩뿌려 놓은 곳도 있다. TV수상기가 바닥에 그냥 놓여 있거나, 돌무더기 속에 오랫동안 존재했던 것처럼 끼여 있다. “테크놀로지가 내 손 안에서 인간적으로 변하기를 바란다”는 박현기의 철학을 떠올리게 된다. 전시는 5월 25일까지.

◇‘백남준 정신’을 살린 젊은 작가들의 ‘랜덤 액세스’전=백남준아트센터가 신진작가들을 위한 공간이 되기를 원했던 백남준의 바람을 구현한 기획전이다. 장르를 넘나들고 관객의 참여를 중시했던 백남준의 정신을 살린 국내 신진작가 10팀의 영상, 설치, 사운드, 퍼포먼스가 선보이고 있다. 노인들이 씹고 보고 기억하는 행위를 작품으로 표현하면 어떨까. 양정욱의 ‘노인이 많은 병원: 302호’는 움직이는 나무 조각 설치작품 3쌍을 통해 기력이 쇠한 노인의 몸과 마음을 표현했다. 접합부문의 마찰음이 만들어내는 ‘끼이익’ 소리, 천천히 움직이다가 한번씩 삐끗하는 나무 조각의 동작에서 이가 아파 제대로 먹지 못하는 노인의 고통이 전해진다. 이세옥의 ‘미래의 방’은 전시 제목과 달리 아날로그적이다. 미로가 만들어진 검은 방에서 ‘내가 걷는 이 길을 좋아한다’는 내레이터 목소리를 들으며 걷다보면 관객은 갇힌 사실조차 잊은 채 뭔가를 사유하게 된다. 소주상자 더미 속에 TV모니터를 박은 작품도 있다. 상자에 색색의 막대기가 꽂혀 있다. 관객이 막대기를 갖고 노는 장면이 모니터에 비치게 한 작품이다. 전시는 5월 31일까지 열린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