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영어 스트레스 자살도 “업무상 재해”

입력 2015-01-31 01:29
부족한 영어실력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기업 부장의 사망에 대해 대법원이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1990년 대기업에 입사한 A씨는 2008년 쿠웨이트의 플랜트 건설현장에 시공팀장으로 임명됐다. A씨는 열흘 동안 현지 출장을 다녀온 뒤 해외에서 업무를 수행하기에는 자신의 영어실력이 부족하다고 자책하기 시작했다. 결국 해외업무를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회사 측에 밝혔고, 이듬해부터는 서울의 본사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것으로 새로 발령받았다.

그러나 영어실력에 대한 A씨의 자책은 끝나지 않았다. A씨는 수첩에 ‘영어 때문에 쿠웨이트에 못 간다. 갑갑하다’ ‘영어도 안 되고, 기술도 안 되고, 자신감도 없고, 퇴직해야 하나’ 등의 답답한 심경을 적었다. 아내에게는 “영어도 못해 해외 파견도 못 나가는 내가 앞으로 부하직원들 앞에 어떻게 서야 될지 모르겠다”며 “죽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새로 발령받은 본사에 출근한 첫날인 2008년 12월 29일 회사 건물 10층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갑자기 뛰어내리려는 A씨를 말리던 동료 직원에게는 “미안해요”라는 말만 남겼다.

1·2심 재판부는 A씨의 아내가 “유족급여 및 장의비를 지급하라”며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했다. 그러나 대법원 2부(주심 김창석 대법관)는 하급심 판결을 뒤집고 아내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극심한 업무상 스트레스 및 정신적 고통으로 우울증세가 악화돼 자살에 이르게 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30일 밝혔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