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7년 옛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대통령 경선부터 숙명의 정적이었다.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두 사람의 ‘9년 전쟁’은 한번 싸움이 붙으면 정국을 흔들 만큼 늘 파괴력이 컸다. 정권 재창출 이후 한동안 휴지기를 보냈던 양측의 다툼은 이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회고록’ 공세를 신호탄으로 재개될 조짐이다.
친박(친박근혜)과 친이(친이명박) 사이에는 두 차례 전면전이 있었다. 1차전은 2007년 대선 경선이었다. 양측은 사활을 건 네거티브를 주고받았다. 당시 박근혜 후보 캠프는 BBK 실소유주 의혹, 서울 도곡동 땅 차명 소유 등 이명박 후보의 재산 형성 과정을 집중 공격했다. 이 후보 캠프는 박 후보와 고(故) 최태민 목사의 관계 등 사생활 의혹을 거론했다. 결국 이 후보가 경선에서 승리해 먼저 대통령이 됐다.
한나라당 주류가 된 친이는 2008년 18대 총선에서 이른바 ‘공천학살’에 들어갔다. 유력한 중진 친박 의원들조차 공천에서 줄줄이 탈락했다. 이들 중 일부는 한나라당을 탈당했고, ‘친박연대’를 조직해 저항했다. 박 대통령은 당시 공천에서 탈락한 친박 인사들에게 “살아서 돌아오시라”고 말하며 탈당을 용인했다. 친박연대는 14석을 얻는 등 선전했지만 좌장인 서청원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등 시련을 겪었다.
2010년엔 세종시 수정안 문제로 2차전이 벌어졌다. 당시 이명박정부가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하자 박근혜 대통령은 ‘신뢰’를 강조하며 원안을 고수했다. 결국 친박들은 야당과 연대해 이명박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을 국회에서 부결시켰다
두 차례의 전면전 외에도 크고 작은 ‘국지전’은 계속됐다. 신·구정권 교체기에도 갈등이 벌어졌다. 2013년 1월 박근혜정부 인수위원회가 활동하던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 등 측근들을 특별사면했다. 이에 인수위는 “모든 책임은 이 대통령이 져야 할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박근혜정부 들어서는 친이계 좌장인 이재오 의원이 “박근혜정부는 유신독재 권력으로 회귀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등 ‘여당 내 야당’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임성수 기자 joylss@kmib.co.kr
[靑-MB 정면충돌] 경선 대격돌→ 공천학살 사태→ 세종시 수정안 파동… ‘끝나지 않은 전쟁’
입력 2015-01-31 0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