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봉래 (1) 진정한 교정은 법 아닌 주님의 사랑으로만 가능

입력 2015-02-02 02:46
김봉래 목사가 29일 충남 홍성군 홍성교도소교회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김 목사는 1997년 국내 최초로 교도소 내에 교회를 세우고 재소자와 교도관, 경비교도대원을 위한 전도에 힘써왔다. 예배당 뒤로 감시대가 보인다.

인생은 60부터라고 한다. 나에게 60은 나눔의 나이다. 60년을 받았다면 후반생은 주는 삶을 살고 싶다. 1975년 교정직 공무원 시험을 치르고 처음 발령받은 곳이 제주교도소였다. 그로부터 30년을 교도관으로 살았다.

사람들은 교도소라고 하면 색안경부터 쓰고 본다. 물론 이해한다. 교도소에 오는 사람들은 분명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일부러 죄를 지었든, 우발적 범행이든 일단 그들은 격리된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은 말하고 싶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우리 역시 죄를 지으면 교도소에 가야 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 잠정적 수감자인지 모른다.

빵 한 조각을 훔쳐 19년이나 감옥에 살아야 했던 장발장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다. 너무 배가 고파 먹을 것을 훔쳤다는 이유로 소년원을 거쳐 교도소로 들어오는 어린 소년들이 있다. 그들은 경미한 죄를 짓고도 합의금이 없거나 방패막이가 되어 줄 보호자가 없어서 소년원과 교도소 신세를 진다. 어린 나이에 교도소에 들어오면 사회를 탓하게 된다. 아무도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고 다시 돌아간다 해도 반겨줄 사람이 없다. 죄가 죄를 낳는다는 말처럼 막장으로 치닫는 경우도 많았다.

그동안 참 많은 수감자를 만났다. 1만명은 족히 넘을 것 같다. 그들을 대하면서 마음에 확신 하나가 생겼다. 진정한 ‘교정(correction)’은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교도관으로서, 그리고 전도자로 살아오며 그 사랑을 목도했다. 하나님 사랑은 때때로 상처를 받지만 더 강해졌고, 미약했지만 위대했다. 단순 절도범에서부터 가정파괴범, 무기수도 그 사랑 앞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하나님 사랑은 차별이 없다. 재소자들도 동일한 구원의 대상이다.

나에겐 꿈이 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수감자였다가 출소한 형제자매들의 자활을 돕고 싶다. 궁리 끝에 내린 결론은 김치공장이다. 출소자들의 손으로 직접 김치를 만들어 판매해 수익을 창출하고 무의탁 재소자들에게 영치금을 넣어주는 것이 사업의 핵심이다.

출소자들은 김치공장에서 일하면서 매월 급여를 받아 가족을 부양하게 된다. 또 불우한 이웃을 돕는 일에 힘을 보태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훈련을 받게 된다. 좀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출소자들을 위한 신앙훈련을 지속하고 자연 사랑을 배우는 배추농사도 해볼 계획이다.

김치공장을 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출소자들은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갖고 있어도 취직하는 것이 힘들다. 그만큼 사회적 편견이 심하다. 나는 교도관으로 지내면서 그 비참한 현실을 지켜봐야 했다.

우리는 출소자들을 진정한 사회인이자 신앙인으로서 환영해야 하며 살아갈 터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배는 고프지 않게 해야 한다. 우리가 못하면 하나님은 하실 것이다. 주님은 돌이라도 쓰실 것이다. 이제부터 내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를 소상히 밝히고 싶다.

홍성=정리·사진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약력=1948년생. 1975년 제주교도소 교도관. 2005년 홍성교도소 교도관 은퇴. 1997년 전국 교도소 중 유일하게 교도소 안에 교회 설립. 2001년 교정대상 본상부문 교화상 수상. 대한신학대학원 목회연구원. 2005년 예장(백석)에서 목사 안수. 2011년 총회신학대학교 목회대학원(석사과정) 졸업 현 홍성교도소교회 담임. 전국직장선교목회자협의회장. 홍성교도소 교정위원. 법무부 대전교정청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