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손석희 앵커가 진행하는 JTBC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에서 ‘부끄러움’이란 단어를 선정하였다. 이는 중앙일보 권석천 사회부장의 칼럼에서 인용한 단어인데, 요즘 벌어진 여러 사회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의 공통점이 부끄러움이 사라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부끄러움이 없는 이들의 특징으로는 오히려 자신이 억울하다고 항변하는 모습이었다. 다른 표현으로는 내가 아닌 나를 나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속이는 모습이었다. 자신을 직시하고 적절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이 오히려 성숙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서에서 부끄러움의 근원을 찾아보면 어떤 것이 떠오르는가? 십중팔구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까지 서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한 부분을 떠올릴 것이다(창 2:25). 그렇다면 부끄러움은 범죄로 인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감정이니까 그리 성숙한 감정은 아니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부끄러움이 창세기에서 언급한 부정적인 특성을 고려한 의미로 볼 때에는 그 반대말이 ‘떳떳함’이 될 것이다.
윤동주의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여기에 감정이입을 해보면 우리들은 대부분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되 떳떳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둘 중 하나가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일 것이다(눅 18:10∼14). 즉, 부끄러움을 떨칠 수 없는 죄인으로서의 자세를 갖거나 충분히 떳떳할 만한 부분을 붙들고 스스로를 의롭다고 칭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니 후자의 사람이 바로 처음 언급한 부끄러움이 사라진 사람들이다. 비록 부끄러움은 우리가 그만큼 잘못하였다는 면에서 부정적인 단어이긴 하지만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전제를 두고 생각해볼 때 지금은 오히려 성숙을 위한 필수적인 항목이라고 긍정적으로 포장이 된다.
부끄러움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단어로 창피, 수치, 죄책감이 있다. 이 단어들은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찬찬히 다시 따져보면 그 의미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부끄러움의 동의어로 감동이라는 단어를 억지로 추가한다. 물론 정확한 동의어는 아니다. 하지만 부끄러움과 감동은 인간 심성의 측면에서 많이 닮았다.
누군가가 지적을 받고 있다고 하자. “너는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해!” 혹은 스스로 자책을 하고 있다고 하자. “정말 나 자신이 부끄럽다.” 왜 부끄러운 사람이 되었나? 자기 민낯을 드러내는 어떤 말, 태도, 행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발적으로든 남의 지적에 의해서든 부끄러움을 지니게 되면 우리는 뭔가 모를 분노와 억울함이 올라온다. 그리고 다 이유가 있었다고 변명하거나 왜 남들은 그냥 잘 넘어가주면서 나만 지적하느냐고 따지게 된다. 확실히 개인의 잘못은 한 사람의 탓만은 아니며 대개는 공동의 책임이 있다. 그런 점을 서로 인정하지 않고 한 사람에게만 부끄러움을 가지라고 지적하면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듯 부당하다는 몸부림을 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이 하와를 걸고 넘어가고, 하와도 뱀을 걸고 넘어갔을 것이다. 개인에게만 희생양처럼 몰고 가는 부끄러움은 반항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함께 느끼는 부끄러움은 각자를 더욱 부끄럽게 하되 그것이 서로를 공격하기보다 서로를 감싸는 연대감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입장에 가까운 단어가 바로 ‘감동’이기 때문에 나는 감히 부끄러움의 동의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부모가 평소 자녀에게 감동을 주었다면 어느 시점에서 자녀에게 부끄러운 부분을 지적할 때에 반항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최근에 나도 부끄러운 경험을 많이 하였는데 아쉽게도 감동은 그만큼 같이 하지 못했다. 그래서 푸념처럼 이 글을 쓰나보다.
최의헌 <연세로뎀정신과의원>
[최의헌의 성서 청진기] 부끄러움
입력 2015-01-31 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