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신달자] 숨어있는 기쁨

입력 2015-01-30 02:20

팔 하나를 깁스한지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절반의 깁스로 바뀌면서 굳은 팔을 꺾는 작업에서 거의 죽음 같은 고통을 경험했다. 너무 울었는지 꿈속에서 내가 심하게 흐느끼고 있는 것을 보고 스스로 “아이구 불쌍해라”하는 생각을 했다. 딸에게 말했다. “내가 불쌍하게 보였어.” 마흔의 중간을 넘어서는 딸은 스승처럼 내게 말했다. “엄마에게 좋은 일이 있었을 텐데 숨어 있는 기쁨을 찾아 악수해 보세요.” 속으로는 좀 섭섭했고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 말은 내가 딸에게 해야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순서가 좀 바뀐 게 확실하다.

이번에 팔을 다쳐 몇 번을 그야말로 뼈를 깎는 통증으로 울었다. 고통 그 다음 페이지로 넘겨지지가 않았다. 내 아픔 외에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가능한 한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살려고 나름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내가 몸이 불편하면 주변에 폐를 끼치는 것 아닌가. 그 또한 고통이었다. 결국 몸도 마음도 불편해져서 우울해지고 말 수가 적고 웃음의 빈도가 낮아졌다. 나에게 그 어떤 즐거움도 없다는 듯 말이다.

그러나 딸의 말대로 나에게도 적잖은 행복이 있다. 적잖은 기쁨이 있다. 아니 있을 것이다. 내 마음의 우울로 그것을 보지 못하면 결국 팔 다친 몇 배 나는 손해를 보는 일일 것이다. 누구나 삶의 갈피갈피에는 서러움도 있지만 생생한 기쁨이 있지 않겠는가. 지난 흐린 페이지 속에 갓 피어난 꽃 같은 기쁨을 내 마음으로 더 흐릿하게 만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기뻐해야 할 근거는 얼마든지 있다. 사실 내가 울고 흐느끼는 것까지 말이다. 아프면 울 수도 있다. 기쁨은 울음 밑에 존재할 수도 있다. 얼음 밑에 봄이 있듯 말이다. 고통만 가지고 불평을 토로하는 일에 익숙하고 의식적으로 기쁨을 찾아내려고 하는 일에 나는 서툴렀다. 딸의 말을 존중하는 의미로 기쁨 쪽으로 시선을 두기로 맘먹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쁨은 충만한 삶의 다른 표현이라고 했다. 그러나 기쁨은 일종의 ‘실현’이다. 인간이 애써 이룬 삶을 자각하는 순간 얻어지는 농산물이지 않겠는가.

신달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