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읍교회-언양제일교회] 말 탄 호주 선교사, 복음의 땅 밀알이 되다

입력 2015-01-31 02:35
일러스트= 정형기 jhk00105@hanmail.net
왕길지 선교사와 부인 클라라.(왼쪽 사진) 1970년대로 추정되는 사택 앞 사진.
옹성에서 바라본 언양제일교회.(위 사진) 남문 영화루 뒤로 언양초교가 보인다.
변인덕 목사, 김도헌 장로, 최춘식 원로장로(왼쪽부터)가 옛 당회록을 살피고 있다.
울산 울주군 언양읍은 한국 현대기독교사에 있어 의미 있는 곳이다. 세계적 복음의 거장 조용기 목사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현 KTX 울산역사 뒤쪽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에 조 목사 생가가 있다. 조 목사는 조두천·김복선 부부의 5남4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조두천 장로(작고·여의도순복음교회)는 한학에 밝았다. 교동이란 지명에서 알 수 있듯 이 마을은 지금도 언양향교가 자리한 유서 깊은 마을이다. 조선 전기 관립학교인 향교가 자리했다는 것은 그 일대가 번성한 고을이었다는 얘기다.

실제 언양향교에서 태화강 지류 남하강 건너로 언양읍성이 보인다. 직선거리로 1㎞ 남짓이다. 조 목사는 어린 시절 언양읍성 안에 위치한 언양초등학교를 다녔다. 입학 당시 언양공립보통학교였다. 조 목사는 운동감각이 뛰어나 그 학교 육상부 선수로도 활동했다.



조용기 목사가 다닌 초등학교 품은 읍성

지난 27일 언양읍성 남문 영화루에 올랐다. 2013년 복원된 주 출입문이다. 팔작지붕의 영화루는 반원형 옹성을 두었다. 옹성 앞쪽으로는 해자가 있었으나 거기까진 복원되지 않았다. 누각에서 보면 읍성 안과 밖이 한눈에 보인다. 복원 전에는 성곽이 잘려나가 성돌만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일제는 근대도시 조성을 이유로 성곽과 관청 건물을 파괴했다. 다만 관청 건물 가운데 규모가 큰 동헌과 객사는 각기 무단 통치와 황국신민화를 위해 사용했다. 통상 동헌은 주재소, 객사는 공립보통학교로 쓰였다. 언양초등학교 역시 이 과정을 거쳤다. 객사 자리인 것이다. 언양읍성 복원 계획에 따라 이 학교도 곧 신택지로 옮겨가게 된다.

옹성 위에서 남쪽으로 보면 우뚝한 십자가가 들어온다. 이 지역 중심 교회로 1902년 설립된 언양제일교회(변인덕 목사)다. 성문에서 불과 80m 거리다. 이 교회 예배당은 1909년 이래 쭉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교회 첫 예배는 1902년 조 목사의 고향인 교동리의 수남마을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교인이 늘자 남문 밖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옛고을에 도대체 어떻게 복음이 전파된 것일까. 그 시작은 부산·경남 지방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한 독일 출신 왕길지(Gelson Engel·1864∼1939) 호주선교사로부터 비롯됐다. 1900년 9월 아내와 함께 부산에 도착한 그는 부산과 울산을 포함한 경남 동남부 지역 선교를 맡았다.

그는 부산진교회에 시무하면서 입국, 이듬해 6월 순회선교사로 울산, 언양, 장기, 감포, 경주 등을 말을 타고 돌며 전도에 나섰다. 그의 일기에 따르면 6월 6일 목요일 장기(지금의 포항 구룡포)에 살고 있는 교인 ‘김 서방네’ 심방을 갔다가 언양을 거쳐 통도사에서 1박을 한 후 교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왕길지는 당시 번화한 읍성인 언양읍내에서 점심을 먹고 통도사 쪽으로 향했다. 그 일행이 수남마을 벚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고삐가 풀려 말이 달아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일행이 마을에 들어가 말을 찾던 중 말이 정희조라는 사람의 콩밭에 들어가 밭작물을 훼손한 사실을 알게 됐다. 왕길지는 “밭 피해를 보상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정희조는 “말 못하는 짐승이 한 것을 어찌 그리 하겠소”하고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 때 왕길지는 ‘한국인의 예’가 무엇인지를 알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1년 후 교동리 밭주인 정희조는 언양의 첫 신자가 되어 자신의 집을 처소로 내놓았다. 그것이 1902년 9월 15일의 일이다. 이러한 일화는 왕길지의 일기에서만 확인된 게 아니다. 정희조의 증손자 정길원(언양평강교회) 집사의 가계사 구술에서도 그 일치함이 확인됐다. 정희조는 훗날 부산 동래 안평교회 설립에도 관여한다.

이렇게 울주 지역 중심 교회가 된 당시 수남교회는 인근 반천, 보은, 궁근정(지금의 상북)에 교회를 분리 개척하고 그래도 교인을 감당할 수 없자 읍성 남문 앞 지금의 교회 터로 이전한다. 와가 5칸을 매입, 동부교회라 칭했다. 1917년 이후로는 언양읍교회로 불렸다. 언양제일교회로 명칭이 변경된 것은 1964년이다.

장날, 교회는 주차장·화장실 개방했다

27일은 장날이었다. 읍내 한복판에 위치한 교회 주차장은 평일인데도 차들로 꽉 찼다. 예배당 옆 교육관 1층 화장실도 개방되었다. 주차장은 주차하기 편하게 되어 있었고, 화장실은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처럼 깨끗했다. 세면대에 ‘비누 집어가지 마세요’ 외에 이용자의 주의를 촉구하는 팻말도 없었다. 주차장 및 화장실 개방은 한국 교회가 지녀야 할 덕목이나 실상은 딱히 그렇지만도 않다. 관리가 쉽지 않다는 이유로 닫아 놓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날 변인덕(46) 목사와 최춘식(69) 원로장로, 김도헌(62) 시무장로가 당회장실에 모였다. 최 장로는 장날을 기해 울주 지역 은퇴장로들과 모임이 있었음에도 당신이 평생 섬긴 교회 역사를 소개하겠다며 나왔다. 김 장로는 3대째 신앙을 잇는 이 지역 신앙의 명가 후손이다. 변 목사는 2013년 대구 삼덕교회에서 시무하다 청빙에 응했다.

최 장로는 울주 교회지역사에 능했다. 20대 후반 결혼 후 읍내에서 양복점을 하며 교회를 섬긴 그는 113년 전통의 교회 역사를 자랑스러워했다. 힘이 부족해 100년사를 내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그는 “선대가 남문 앞 미나리꽝을 메워 교회를 세웠고, 작두에 손을 넣어 신앙을 고백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작두는 언양제일교회가 울산 서부의 못자리교회가 되도록 눈물로 기도한 한 여인의 신앙을 말한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기를 살았던 우보은 성도는 친정조카의 권유로 예수를 믿다가 송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그러나 적이 그러했듯 서양 귀신에 미쳤다며 핍박을 받았다.

송씨 가문에서는 우 여인을 소여물 써는 작두 앞에 무릎 굻게 하고 신앙을 시험했다. 팔목을 자르겠으니 그래도 예수를 믿겠느냐는 탄압이었다. 여인은 순교자의 심정으로 “예”라고 답했다. 송씨 가문은 그를 내쳤다. 그리하여 우 여인은 지금도 문중 묘지에 있지 못하고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그러나 그의 자녀 4남2녀는 어머니의 신앙에 따라 네 아들 중 송덕윤 등 세 아들이 언양제일교회 등의 장로가 됐고 두 딸은 권사가 됐다. 또 그 우 여인의 자손과 울산·경남 지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은편교회(1899) 설립자 김재명 장로가와 혼인을 맺었다. 그 후손이 바로 김도헌 장로다.



최 장로 “타관바치 사랑으로 안은 교회”

최·김 장로가 열성으로 언양제일교회를 섬기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이후다. 최 장로는 경주 출신이었으나 큰병을 얻고 예수를 믿은 후 재단사로 언양읍내에 정착해 성경 말씀대로 살았다. “결혼해 단칸방에 치매 걸린 어머니를 모시고 살다 돌아가시자 의지할 곳이 없었는데 타관바치인 나를 위해 교회가 장례 문제 등을 끌어주는 것을 보고 사랑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김 장로는 이곳 한 제조회사에 다니면서 선대와 인연이 깊은 언양제일교회에 헌신하게 됐다.

언양읍은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오지였다. 1959년 사라호 태풍 피해 보상금으로 지은 교회 관사 시멘트 건물이 울주군 첫 양옥건물이었을 정도다. 그 양옥은 증축해 지금은 다문화선교센터로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옛고을 언양은 복음의 땅이다. 옛것을 새롭게 한 그 복음의 땅에서 조용기 목사가 태어났다. 조 목사가 다닌 성읍의 언양초교 교문 앞엔 지금도 옛 모습과 크게 변하지 않은 언양제일교회가 있다. 작고 초라한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태어났듯 소외된 땅 어디선가 꿈을 꾸는 이가 있을 것이다.

언양=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



“언양제일교회는 제일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역할과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언양읍성과 함께했습니다. 성문을 닫을 때는 양식이 비축되어야 하듯 말씀 양식이 곳간에 가득해야 합니다. 성문이 열릴 때는 지역주민과 소통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언양은 교통 요충지가 됐습니다. 인구 유입도 늘고, 교인도 늘었습니다. 독거노인 등 어려운 이웃을 돕겠습니다. 관내 서울산병원 등 병원 선교와 필리핀 등 세계 열방 선교에 힘쓰겠습니다. 올해 교회 표어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라’(골 1:23)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