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죄부 판매라는 기독교의 암흑기가 세상을 창백한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었을 때였다. 심지어 구원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면죄증서에 쓰여 있었다. 교황과 교회는 축복과 저주를 성경의 메타포로 둔갑시켜 믿음의 본질을 왜곡시켰다. 말씀을 통한 진정한 의미의 구원으로 대중이 접근하는 것을 철저하게 봉쇄해 버린 것이다.
500년 전, 목숨을 걸고 교황의 부정한 권력과 교회의 부패에 맞섰던 얀 후스와 존 위클리프가 눈엣가시였던 당시 교회의 기득권층들은 또다시 마르틴 루터라는 한 남자의 결연한 의지가 몹시 성가셨을 것이다. 주동자를 처단함으로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낼 수 있었던 두 남자의 저항과 달리 루터와 그를 만난 틴 데일의 전략은 보다 치밀한 것이었다. 서슬 퍼런 칼날의 위협 앞에서 성경의 참 뜻을 거두지 않았던 이들의 스릴 넘치는 일화들은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마음껏 묵상할 수 있는 믿음의 모험이었다.
2011년 11월 비텐베르크에 도착한 날, 겨울의 독일 날씨는 안개로 뒤덮여 꽤나 스산했다. 자전거를 타고 10분이면 다 둘러볼 수 있는 작은 마을은 기독교의 획을 바꾼 역사의 현장답지 않게 대체로 차분했다. 루터의 흔적들을 따라 여러 곳을 방문하다 드디어 95개조 반박문을 선포한 비텐베르크 대학 예배당 앞에 도착했을 땐 요동치는 감격을 주체할 수 없었다. 라틴어에 서린 시대의 진심을 마음으로 읽어내려갔다.
사실 종교개혁의 백미는 비단 선언뿐이 아니다. 독일 전역으로 종교개혁의 불들이 빠르게 점등되어갈 때 위기를 느낀 교황 레오 10세는 그에게 파문장을 보냈다. 얼마든지 회유와 협박으로 그를 옭아맬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루터는 오히려 그것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워 버렸다. 이 장면은 정말 믿음으로 살리라는 신앙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반항은 죽음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그는 도피하면서도 대중에게 하나님의 올바른 말씀을 확산시켜 나가야겠다는 임무를 완수해 나갔다.
덴마크에서 배를 타고 독일의 록스톡에 당도했을 때 뼈까지 시린 찬바람을 가로지르며 독일 횡단에 나섰다. 5시면 이미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 내렸고, 날마다 빈 건물이나 구석진 장소에 텐트를 치며 버텨냈다. 이따금 따뜻한 음식을 건네거나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샤워를 허락하며 격려하는 이들을 만날 때면 더없이 고맙고 서러운 눈물을 흘렸다. 비싼 물가에 숙박은 물론 하루 두 끼를 먹는 것도 사치라 바게트로 버텨냈다. 비텐베르크에 오기 위함이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십자가를 지는 데는 인색한, 거칠고 때론 못돼먹은 성정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고생을 자처하는 한국의 젊은 청년을 위로해주셨다. 유럽에 드물게 남겨진 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목사님께서 나를 초대해주신 것이다. 그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광야의 여정을 강의해줄 것을 부탁했다. 하룻밤 묵을 잠자리와 저녁 식사는 값진 강의료였다. 강의를 마친 후 우리는 루터와 독일 교회, 그리고 교회의 존재를 위협하는 요소들과 이에 답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에 대해 좀 더 나눌 수 있었다. 비텐베르크는 출발할 때부터 내 자전거 세계일주의 첫 번째 목표였다. 꿈을 이루게 되던 그날 밤, 나는 고단함에도 쉬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나는 여기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 1521년 4월 18일 루터가 브롬스 의회에서 행한 연설의 마지막 부분은 진리를 따르려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슴에 격한 은혜와 도전을 주고 있다. 나도 그런 인생을 살고 싶다. 루터를 만난 이상 이제 틴 데일을 만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다음 날, 자전거 바퀴는 벨기에로 향했다.
문종성 (작가·vision-mate@hanmail.net)
[문종성의 가스펠 로드] (41) 독일 비텐베르크대학 예배당 앞에서
입력 2015-01-31 0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