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열정페이’… 내 청춘을 갉아먹었다

입력 2015-01-29 03:12

“자원봉사하는 기분이었어요.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채로 끝났죠.” 대학 4학년생 김모(24·여)씨는 지난해 한 미술관에서 두 달간 인턴으로 일한 경험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서양화를 전공하는 김씨가 미술관 인턴을 한 이유는 진로 선택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기대가 컸다. 전시와 프로그램 기획 같은 미술 관련 업무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참담했다. 미술관 직원과 인턴은 근무 공간부터 분리돼 있었다. 직원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곁눈질로도 볼 수 없었다. 필요한 일이 있을 때만 전화로 호출했다. 그렇게 불러서 시키는 일이 대부분 청소와 설거지 같은 허드렛일이었다. 김씨는 “두 달 내내 도움이 될 만한 교육적 내용은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다른 여대생 A씨가 인턴 경험을 바라보는 시각은 더 냉소적이다. 민간기업 3곳에서 인턴을 해본 그는 “지나고 보니까 그렇게 호구가 아닐 수 없다. 학생을 위한 실습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싼 임금으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청년들이 현장실습과 경력 쌓기 같은 명분으로 ‘과도기 노동’을 하면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 채 사실상 착취당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과도기 노동은 청년들이 안정적 직업을 얻는 데 필요한 역량과 경력을 얻으려고 하는 일을 말한다. 인턴이 대표적이다.

일자리가 줄고 기업들이 경력직을 선호하면서 과도기 노동은 필수 코스가 됐다. 고용정보원이 2012년 전문대졸 이상 1만829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13.8%(2526명)가 졸업 전후 인턴 등을 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영화업계에서 일하고 싶었던 B씨도 인턴을 하며 노동력을 헐값에 착취당했다. 영화 관련 전공이 아닌 그는 업계 정보를 조금이나마 더 얻으려고 적은 급여에도 영화제 인턴을 자원했다. 월급은 최저 임금의 절반 수준인 40만원이었다.

더 실망스러운 것은 업무 내용이었다. 소모품 취급을 받는 듯했다. 직원들은 업무를 잘 알려주지 않았고, 물어봐도 대답을 못했다. 직접 자료를 찾아 공부해야 했다. 교육은 없었다. 계약직이나 정규직 대신 값싼 인턴을 뽑아 쓴다는 인상이 강했다. 그는 “인턴을 한 뒤 오히려 업계에 대한 애정이 식었다”고 말했다.

인턴은 연수·훈련에 목적이 있지만 현실에선 ‘열정페이’의 다른 말일 뿐이었다. 과도기 노동 속 청년 착취가 만연해 있지만 관련 제도는 전무하다. 미국의 경우 인턴십 과정이 인턴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못 박고 있다. 또 인턴이 기존 직원의 면밀한 감독 아래 업무를 수행토록 기준을 제시한다.

김민수 청년유니온 대표는 28일 “대학 교육과정에서 안정적 근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인턴과 수습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중간단계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커졌다. 실질적으로 노동자의 성격이 강한 만큼 ‘과도기 노동자’에 대한 근로조건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