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밑바닥 삶을 껴안는, 밥물처럼 풀어진 詩語

입력 2015-01-30 02:20
시인 김수열
“어느젠가 ‘자리물회 맨들아시매 왕 시원히 혼 사발 허라’하는 말에 가서 먹는데, ‘식당엣것보다 맛좋수다’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했는데 그 때부터 어머니는 해마다 자리철이면 시장에 가서 자리 사다 조선된장에 빙초산 넣고 조물조물 버무려 물회를 만드신다”(‘자리물회’)

‘참여시인’ 꼬리표가 붙은 제주 시인 김수열(55·사진)의 신작 시집 ‘빙의’에는 밥시(詩)가 넘쳐난다. 가장 원초적인 욕구인 먹는 행위는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어머니’(‘삼복을 지나며’)의 사랑을 확인하거나, 오일장에서 ‘아내는 멸치국수 나는 순대국밥’(‘장날’)을 먹으며 중년 부부가 데이트를 하는 매개가 된다. 표제시 ‘빙의’에서처럼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정을 이어주는 것도 ‘흰 술(소주) 붉은 술(콜라)’, 즉 음식이다. 이따금 거침없이 구사되는 제주 방언이 서민 정서를 더욱 살려준다.

문학평론가 김진하씨가 “민중의 삶이란 정직하게 말해서 먹고, 싸고, 사랑하는 것, 그야말로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움직임들이 주조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말할 때, 김수열의 시는 정확히 이 지점에 위치해 있다. 시인에게 사회참여의 행위는 핏발 선 구호가 아니라 밑바닥 삶을 껴안는 것이다. 이는 곧 생계가 서민 삶의 근본 문제임을 시인의 감수성으로 직시하는 데 있다. 그의 밥시 소재가 가족을 넘어 ‘우리 동네 정육점 주인’ 같은 주변사람, 나아가 사회적 이웃의 먹고 사는 문제로 확장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내 밥그릇이 두 개면/누구 한 사람은 밥그릇이 없다는 것//내 집이 두 채면/어느 가족은 마른 하늘 아래 누워/별을 세고 있다는 것”(‘밥그릇’)

그는 이처럼 부의 분배나 강정마을 이슈 같은 사회문제에 대해 발언하면서도 벼린 칼 같은 시어가 아니라 밥물처럼 풀어진 시어를 구사한다. 그게 그의 시가 갖는 힘이자 매력이다.

신작 시집에서는 시의 무대가 연변, 베트남, 모리셔스로 확대된다.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아프리카에서 팔려 왔거나’ 한 모리셔스 노동자들, ‘남조선 담배 한 모금에 눈시울 붉히는’ 탈북자들에 연민을 보낸다.

가난과 함께 시집을 관통하는 또 다른 주제는 죽음이다. 이번 다섯 번째 시집을 내는 과정에서 시인은 부친의 죽음을 맞았다. 곳곳에 아버지의 흔적이 박혀 있다.

‘부러진 대걸레 자루로 지팡이 쓰시는 아버지/멋진 놈으로 하나 사 드려야지, 나중에’처럼 그리움과 회한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보다 핵심적인 변화는 삶과 죽음에 대한 초월적 태도일 것이다. 이렇게 말이다.

“곶자왈 속에 들면 너는/없는 듯 있다/있는 듯 없다/하늘의 눈으로 보면”(‘곶자왈에서’)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