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1950m)의 진면목을 느끼려면 겨울이 제격이다. 눈덮인 한라산의 산세와 주변 오름과의 어우러진 모양이 가장 잘 드러난다. 겨울 한라산의 대명사는 단연 눈꽃이다. 솜이불을 뒤집어 쓴 구상나무숲과 너른 설원은 한 폭의 그림이나 다름없는 황홀경을 선사한다.
한라산은 거대한 규모만큼 오르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길마다 난이도도 풍경도 다르다. 정상에 올라 백록담을 보려면 성판악(성판악∼정상 9.6㎞ 4시간30분)이나 관음사(관음사∼정상 8.7㎞ 5시간) 코스를 이용해야 하지만 겨울의 짧은 해를 감안하면 영실(영실∼윗세오름 3.7㎞ 1시간30분)∼어리목(어리목∼윗세오름 4.7㎞ 2시간) 구간이 권장된다. 현지 주민들이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하는 코스다. 윗세오름에서 남벽분기점(2.1㎞ 1시간) 왕복 코스를 추가하면 금상첨화다. 백록담을 보지 못하는 대신 분화구 남벽의 웅장함과 한라산의 진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돈내코 코스(돈내코∼남벽 7㎞ 7시간)는 거리와 소요시간 등의 이유로 찾는 발길이 덜하다.
영실을 기점으로 윗세오름을 거쳐 남벽분기점을 다녀와 어리목으로 하산하는 경로를 선택했다. 승용차는 주차공간이 넉넉한 어리목탐방안내소 주차장에 세워두고 택시를 이용, 영실탐방안내소로 이동한다(요금 2만원). 영실탐방안내소의 주차장이 여유롭지 못해 몰려든 등산객들의 차량은 입구에서 탐방안내소로 이어지는 도로의 한쪽을 길게 점령한 상태다.
탐방안내소에서 탐방로 시작 지점인 영실휴게소까지 2.5㎞의 아스팔트길은 40여분 걷거나 이 구간만 왕복하는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 눈이 내려도 제설을 하지 않은 탓에 길은 눈썰매장을 방불케 한다. 스노타이어를 장착한 택시가 미끄러운 오르막을 차고 오르는 것을 보면 곡예나 다름없다.
해발 1280m 표지석이 있는 영실휴게소에서 스패츠와 아이젠 등 눈길 산행에 대비한 장비를 착용한다. 입구에서부터 펼쳐진 적송 군락이 상쾌한 소나무의 기운을 듬뿍 전해준다. 그다지 가파르지 않던 등산로는 계곡을 건너면서 급경사로 치닫는다. 등산객을 위해 설치된 나무계단은 계속 내린 눈 속에 파묻혀 비탈길이 된 지 오래다. 겨울 한라산은 눈을 식량인양 재워둔다.
심한 오르막에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하지만 등산로 오른쪽으로 맞아주는 병풍바위 등 기기묘묘한 바위들의 위용은 수고로움을 잊게 해준다. 한라산 풍광의 백미로 불릴 만하다.
영실기암(靈室奇岩) 전설에 나오는 설문대 할망의 자식들이 이랬을까. 오르던 길을 뒤돌아보면 배낭을 등에 지고 영실바위를 오르는 등산객의 긴 행렬이 흉년에 양식을 구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아들 500명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 너머로는 봉긋 솟은 오름들이 줄을 서 있고 햇빛에 일렁이는 바다가 아스라이 펼쳐진다.
휘돌아가는 등산로를 따라 병풍바위 위쪽에 다다르면 거의 수평 길이다. 편안한 능선 길을 따라가면 허허벌판에 구상나무들이 모여 사는 군락지가 나타난다. 고사목이 된 구상나무 가지에 앉은 까마귀도 한라산의 한 풍경을 차지한다. 세찬 바람에 눈이불을 두른 구상나무숲은 환상적인 설경으로 연신 카메라를 들이대는 등산객들에게 훌륭한 배경을 아낌없이 내어 준다. 구상나무 숲을 지나면 은빛 융단이 펼쳐진다. ‘선작지왓’ 눈 평원에서 반사된 햇빛은 눈이 부실 정도다. 그야말로 설국이다.
드넓은 설원을 가로질러 완만한 능선 길을 따라 한라산을 바라보며 조금 더 올라가면 1700m 윗세오름대피소다. 몰려든 등산객들의 총천연색 복장은 수묵화를 화려한 수채화로 바꿔놓는다. 컵라면 등을 사려고 대피소 앞에 길게 늘어선 장사진도 진풍경이다.
대피소에서 남벽으로 향하는 길은 황홀한 은세계다. 두툼한 솜옷을 입고 눈사람으로 변신한 구상나무가 반갑게 맞아주고, 켜켜이 쌓여 하얀 캔버스가 된 천상의 눈마당은 바람이 부는 대로 결을 내고 빛에 따라 반짝인다. 꿈속 같은 풍경은 어깨를 짓누르는 스트레스를 한 겹 내려놓게 만든다.
검은 바위 틈틈이 눈을 쟁인 남벽은 압권이다. 멀리서 손짓하던 거대한 화구벽은 가까이 다가설수록 히말라야 고산지대나 스위스 알프스의 융프라우(4158m) 못지않은 경이로운 위용을 자랑한다. 기묘한 형상의 용암괴석은 금강산 만물상을 옮겨놓은 듯하다. 남벽에서는 자연휴식년제로 길이 폐쇄돼 한라산 정상으로는 갈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남벽에서 윗세오름대피소로 되돌아오는 길도 색다른 풍광을 내놓는다. 갈 때와 전혀 다른 느낌으로 이어지는 경치는 눈을 호강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어리목으로 향하는 길에는 하얀 눈으로 뒤덮여 천지를 분간하기 힘든 만세동산, 사제비동산 등 평원이 황홀한 풍광을 연출한다. 하늘은 파란색, 그 아래는 온통 하얀색이다.
어리목탐방안내소에서 시간적·체력적 여유가 있으면 어승생악(1169m)을 올라도 좋다. 탐방안내소에서 1.3㎞, 30분가량 걸어 오르면 빼어난 전망이 기다린다.
겨울 눈밭을 걷는 것은 힘들지만 트레킹을 마치면 머리는 상쾌해지고 가슴은 더없이 투명해진다. 어떤 강추위라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은 에너지가 몸과 마음 구석구석에 충전된 것이 느껴진다.
설국에서 벗어나 해안으로 내려서면 ‘렛잇고’가 ‘봄의 왈츠’로 변주된 듯 색다른 풍광을 마주하게 된다. 현무암으로 뒤덮인 검은 대지를 노랗게 물들인 유채꽃이 화사한 자태를 뽐낸다. 대규모 유채밭은 섭지코지나 성산 일출봉 들머리, 산방산 인근에 조성돼 있다. 모두 개화시기를 조절해 일찍 핀 것들이다. 노란색에서 눈을 돌리면 초록이 반긴다. 들판에 심어놓은 브로콜리, 무, 쪽파가 한겨울 된바람에도 기세당당하게 겨울 제주도의 한쪽 면을 채색하고 있다. 제주에서는 마음은 벌써 봄이다.
제주=글·사진 남호철 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