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씽씽… 가파른 골목길 누비는 꼬마 마을버스 ‘05’

입력 2015-01-27 00:55 수정 2015-01-27 08:39
서울에 한 대뿐인 '미니 마을버스' 성북05번이 26일 성북구 정릉 2동주민센터 정류장에서 손님을 태우고 있다. 서영희 기자

“카드 찍으세요. 첫차 출발합니다.”

지난 23일 오후 1시30분, 서울 성북구 정릉2동 주민센터 앞에서 연두색 스타렉스가 시동을 걸었다. 서울에서 딱 하나뿐인 ‘승합차 마을버스’ 성북 05번. 노선은 ‘정릉2동주민센터∼중앙하이츠정문∼중앙하이츠후문∼정수초교∼그린빌라∼정수빌라’로 정류장이 고작 6개다. 운행거리도 왕복 2㎞에 불과해 언덕길 초입의 주민센터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데 10여분이면 족하다. 오후 1시30분부터 11시 막차까지 하루 승객이 평균 60명뿐인 ‘적자 마을버스’를 하일수(65)씨 혼자 12인승 스타렉스 한 대로 운행하고 있다.

성북05번은 형편이 어려운 주민들이 경사 50∼60도의 가파르고 좁은 골목길을 위태롭게 다니는 게 안타까워 도입됐다. 가게들이 늘어선 골목길 폭은 차 두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다. 불법 주차된 차량과 배달 오토바이, 행인이 뒤섞여 가다 서다를 반복할 때도 많다. 하씨는 “주로 노인들이 타고 학기 중엔 초등학생 아이들도 많이 타기 때문에 안전을 최우선으로 천천히 운행한다”고 말했다.

작은 버스지만 있을 건 다 있다. 광고판, 노선도, 요금통, 교통카드 단말기는 물론이고 전후방과 측면을 비추는 카메라까지 달려 있다. 노선의 80∼90%가 좁고 가파른 골목길이다보니 꼭 필요한 장비다. 승객들은 스스로 문을 열고 차에 올라 조수석 뒤편 단말기에 교통카드를 찍는다. 차 안이 비좁아 누군가 타면 앞자리에 앉아 있던 승객이 자리를 내주고 뒷자리로 가야 할 때도 있다. 마지막에 탄 승객이 문을 닫으면 버스가 움직인다. 없는 건 ‘하차 벨’뿐이다. 승객들은 “세워주세요” “내려주세요” 하며 하씨에게 직접 알린다.

이날 주민 문수식(83)씨는 정릉2동주민센터에서 출발하는 첫차에 올랐다. 6·25참전유공자 총회에 다녀오는 길이라 훈장을 목에 건 채였다. 문씨는 “그나마 이 버스가 있으니 나 같은 사람도 여기를 올라 다닌다”고 했다. 그는 타고 내리는 승객들을 ‘형님’ ‘형수님’이라고 부르며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작은 동네여서 승객 대부분이 이웃사촌이다.

김승진(50)씨는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버스를 탔다. 그는 “나처럼 건강한 남자도 한번 장보러 내려오려면 15분은 걸어야 하고, 눈이나 비라도 오면 아예 내려오지 못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저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사람들은 형편이 어려워 자가용은 엄두도 못내는 사람이 많다”며 “버스가 있다는 게 참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주민자치위원회가 운행하던 이 구간 버스는 2001년 정식 노선으로 자리 잡았다. 처음에는 ‘봉고’였고 ‘그레이스’가 뒤를 이었다가 ‘스타렉스’에 바통을 넘겨준 건 2013년 7월이다. 하씨는 외환위기 여파로 2000년에 명예퇴직한 뒤 2001년부터 용돈벌이 삼아 이 마을버스를 몰았다. 처음엔 하루 10시간 가까이 짧은 구간만 반복하다보니 힘들기도 했고 ‘동료’가 있는 다른 노선과 달리 외롭기도 했다고 한다. 하씨는 “아직도 승객 없이 다니는 날에는 적적한 기분이 들지만 통행이 불편한 주민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보람이 더 크다”고 말했다.

운행 첫해에는 하루에만 200명 가까이 버스를 탔다. 2002년 아파트가 들어서고 골목이 많아지면서 지름길이 생기자 손님이 3분의 1로 줄었다. 빈 차로 운행하는 일도 잦다. 이날도 오후 1시30분부터 3시까지 승객은 23명뿐이었다. 그래도 성북05번은 매일 이 언덕길을 달린다. 영리 목적의 운송사업이라기보다 지역사회 봉사에 가깝다.

이 노선을 운영하는 대진여객 관계자는 “한 달 운행한 돈으로 하루치 기름값이 나올까 말까”라며 “주민 편의를 위해 적자를 감수하고 있다”고 했다. 성북05번은 매일 오후 10시부터 ‘안심귀가 마을버스’ 서비스도 제공한다. 여성과 노약자 승객을 정류소가 아닌 집 앞까지 바래다주는 식이다.

이런 ‘미니 마을버스’는 서울에 여러 대 있었는데 이제는 성북05번이 유일하다. 15인승 이스타나 등이 누비던 마포04번은 아현동이 재개발되면서 2009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성북15번은 2013년 말 25인승 카운티로 차종을 변경하면서 ‘미니’라는 꼬리표를 뗐다.

전수민 기자 진서연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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