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 넘버 5’를 든 인디언 버려진 앤틱에 위트 더하다

입력 2015-01-26 03:53
헌책방 등에서 모은 인디언 사진들로 표현한 극사실주의 집단 초상화. 가운데 인디언이 미국 여배우 메릴린 먼로가 애용한 ‘샤넬 넘버 5’ 향수병을 들고 있다. 왼쪽은 ‘LA CHAMBRE No. 5’.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구한 와인 병에 여체를 그려 넣었다. 이 여성은 미국 현대 사진작가 만 레이의 작품을 차용한 것이다. 더페이지갤러리 제공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재미작가 변종곤(67·사진)의 개인전은 수십 년 모은 앤틱 수집품의 즐거운 반란을 보는 것 같다. 이런 게 있나 싶은 희한한 컬렉션이 모여 있다. 그 앤틱을 오브제 삼아 다양한 이미지의 페인팅을 입힘으로써 서구문화에 한방 먹이기도 하고, 동서양 문화를 이종교배 시키기도 하며, 성(聖)과 속(俗)이 합쳐지기도 한다.

문제제기를 하지만, 그 방식은 심각하지 않고 위트가 있다. 지난 21일 전시장에 나타난 작가는 ‘뽀글이 파마’에 검은 부츠 차림이었다. 기인이라기보다는 악동 이미지가 강하다.

헌책방과 여행지 등에서 평생 모은 인디언 사진을, 진짜 사진처럼 극사실주의 화법으로 한데 모아 그려 집단 초상화를 만든 작품을 보자. 뜬금없이 맨 가운데 인디언이 미국의 관능적 여배우 메릴린 먼로가 사랑했다는 ‘샤넬 넘버 5’ 향수를 들고 있다. 작가는 “보호구역에 갇힌 인디언의 비참한 처지를 보고 과연 그들에게 필요한 게 뭔지 미국 정부에 묻고 싶었다”고 했다.

풍만한 여체를 연상시켜 모으기 시작했다는 첼로에는 동양 여성 누드를 그려 넣었다. 독특하게 생긴 앤틱 온도계엔 김홍도의 그림에서 따온 듯한 춘화가 야릇하고, 위스키 병에는 신윤복의 미인도를 슬쩍 입혔다. 불상 머리를 떼고 백발 서양 할아버지 두상을 앉혔다. 이국에서 살면서 느낀 ‘문화적 충돌’이 이리 표현됐다. 현대미술의 단골 패러디 대상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도 빠지지 않는다. 가슴을 노출하거나 신용카드를 들고 자본주의를 비판한다.

컬렉션에 대한 답글이라는 의미에서의 전시명 ‘RE: COLLECTIONS’는 그래서 맞춤해 보인다.

그는 할렘가에 버려진 물건들이 고국에서 버려진 자신의 모습을 닮은 듯해 수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구에서 극사실주의 화가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유신시절 창작에 대한 규제를 작품 모티프로 즐겨 그렸다. 이를테면 대구 ‘앞산 미군 비행장 활주로’ 풍경 같은 것이다. 방독면이 논밭에 휘날리는 그림도 있었다.

그는 1981년 돌연 미국행을 택했고 뉴욕 할렘가의 생선가게에서 붓 대신 식칼을 들어야 했다. 그 때를 ‘호주머니에 죽음을 넣고 다니던 시절’이라고 회상한다.

기회는 왔다. 가게 한쪽에 걸어둔 작품 ‘할렘가 풍경’을 뉴욕의 리버데일 갤러리 주인이 알아본 것이다. 동양의 변방 한국에서 온 작가는 이후 주목받기 시작했다. 88서울올림픽 때 백남준, 김창렬 등의 해외 작가와 함께 금의환향했다.

현재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미술관, 클리블랜드 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전시는 서울 성동구 왕십리로 더페이지 갤러리에서 2월 15일까지 열린다.

손영옥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