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기자-지호일] 판결문조차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통진당

입력 2015-01-26 02:30

1980, 90년대 소위 ‘운동’을 했던 많은 이들이 민족민주(NL) 계열의 편협함과 자신의 노선을 ‘절대선’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에 신물을 느껴 활동을 접었다. 심상정 노회찬 등 평등파 당원들이 통합진보당을 뛰쳐나오며 던진 비판의 핵심도 ‘패권주의’였다. 그런데 지금 몸체가 사라진 통진당 모습에서도 여전히 그 속성이 엿보인다.

대법원이 이석기 전 의원에게 ‘내란선동은 유죄, 내란음모는 무죄’란 판결을 내리자 옛 통진당 의원들은 “헌법재판소의 통진당 해산 결정은 근거가 없어졌다”며 다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대법원이 지하혁명조직 ‘RO’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RO 비밀회합’ 내용을 주요 근거로 삼은 해산 결정에 치명적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당 핵심 의원과 간부의 내란선동 혐의가 유죄로 확정된 사실은 애써 무시하고 있다. 내란선동도 내란예비·음모에 준하는 중대 범죄라는 게 대법원의 일관된 판단이다. 두 죄목은 법정형도 ‘3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로 동일하다. 대법원은 이 전 의원 등의 2013년 5월 비밀회합 발언이 ‘한 지방의 평온을 해할 정도의 폭동’, 즉 국헌문란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또 “가까운 장래에 구체적 내란 결의를 유발할 위험성이 충분했다”고 적시했다. 그럼에도 내란음모죄가 인정되지 않은 건 “내란범죄를 실행하겠다는 확정적 합의에 이르렀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헌재는 통진당의 ‘목적’과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며 해산을 선고했다. 이런 경향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례로 5월 회합 내용을 들었다. 다만 RO의 실체에 대한 별도의 판단은 하지 않았다. RO의 존재 여부가 핵심 쟁점이었던 형사사건과 달리 헌재는 회합의 위험성과 통진당과의 연관성을 중점적으로 봤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대법원과 헌재가 사실관계 파악을 달리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 오도’일 수 있다.

어찌 됐건 이 전 의원 등 130여명이 심야에 몰래 집결해 전쟁 발발 시 통신·유류·철도 등 국가기간시설을 파괴하는 방안을 논의한 뒤 ‘바람처럼 사라진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대중정당을 표방했던 이들이라면 이에 대한 성찰과 사과가 우선돼야 할 텐데, 판결문조차 여전히 ‘보고 싶은 대목’만 보려는 듯하다.

지호일 사회부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