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문건 유출과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갑질’ 논란, 인천 어린이집에서의 아동 학대에 이은 연말정산 파동. 지난해 말부터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이다. 이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격하다. 이념과 세대, 지역 간 구분 없이 거의 모든 이들이 동시에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한 사건이 매듭지어지기 전에 또 다른 사건에 의해 공분(公憤)이 분출되고 있는 현상도 주목된다. 이러다 집단분노가 일상화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쓰나미를 연상시키는 분노의 행진에는 순기능이 있다. 탐욕과 일탈, 부조리, 시스템 부재 등 우리 사회에 손봐야 할 부분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권력욕에 사로잡혀 국정을 어지럽힌 사람들, 회사 직원을 하인(下人)쯤으로 여긴 재벌 3세, ‘풀 스윙’으로 어린 아이를 후려친 보육교사, 거위에서 몰래 깃털을 뽑듯 월급쟁이들 주머니를 슬그머니 털어가려는 정부 등등.
그럼에도 대중의 분노가 조금 과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이들의 신상을 털어 공개하거나 검·경·사법부에까지 압력을 행사하려는 행동은 정상이 아니다.
이런 비정상까지 포함해 대중이 울분을 토로하고 있는 이유를 생각하면 씁쓸하다. 감정의 분출구가 없는 사회, 억눌려 갑갑한 사회의 책임이 큰 탓이다. 심화되는 양극화와 팍팍해진 삶의 질로 하루하루 살아가기 힘들어진 데다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진정한 ‘어른’마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불만과 절망, 허탈, 슬픔, 무력감 등이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을 가능성이 다분한 구조다. 그런 와중에 감성을 자극하는 사건들이 잇따라 터지면서 내재돼 있던 불만 역시 한꺼번에 뿜어져 나오고 있는 상태라고 하겠다. 여기에다 진화된 SNS, 한(恨)이라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가 대중의 일체감을 강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온 국민을 우울하게 만든 세월호 참사 이후 9개월여가 지났지만 국민 안전을 담보할 대책 마련이 지지부진한 것도 한 요인일 것이다.
어떡해야 할까. 자연스럽게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에게 눈이 간다. 소외된 이들을 다독이며, 사회안전망을 보다 치밀하게 짜는 게 그들의 책무다. 갈등을 원만히 푸는 것도 그들의 역할이다. 하지만 실제 모습은 실망스럽다. 대중들이 화를 내면 뒤치다꺼리 하느라 분주하다. 소 잃기 전에 외양간 고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소 잃고도 외양간을 제대로 고치지 못하는 경우마저 있다. 갈등을 해소하기는커녕 증폭시키기 일쑤다.
집단분노는 당분간 지속될 것 같다. 다만 방법이 세련됐으면 좋겠다. 그악스러운 화풀이에 그쳐선 안 된다. 정부와 정치권, 기업 등 원인 제공자들이 충분한 후속조치를 취하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한다. 불통인 정치인에 대해선 다음 선거에서 반드시 퇴출시키고야 말겠다는 다짐도 필요하다. 그래야 정치 지도자와 나쁜 ‘갑’들을 그나마 바로잡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인적개편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12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성과 원칙을 강조하며 화를 내는 대중에게 훈계하려 했던 때를 연상하면 의외로 인사의 폭이 큰 편이다.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과 ‘문고리 3인방’의 건재(健在)는 답답한 일이지만, 정치인 출신 새 총리 후보자가 현 정부 처음으로 나왔다. 신임 청와대 수석비서관 3명도 임명됐다. 개각 폭도 다소 커지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성과 원칙은 중요하다. 그러나 국민정서를 경시해도 무방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리석게 들릴지라도 국민의 진솔한 심경이다. 사실과 다르다고 도외시하면 민심은 더 멀어질 뿐이다. 어설프더라도 납득시켜야 한다. 인적개편을 계기로 박 대통령이 국민정서를 보듬는 따뜻한 리더십을 발휘하길 기대한다. 30%로 추락한 지지율, 이성과 원칙만으론 회복할 수 없다.
김진홍 수석논설위원 jhkim@kmib.co.kr
[김진홍 칼럼] 이성보다 감성이다
입력 2015-01-26 0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