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교육 선구자, 아펜젤러] (11) 선교 여행 중에 만난 복음의 씨앗

입력 2015-01-27 03:57
한국인 권서들이 쪽복음을 전달하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왼쪽). 당시 명동성당의 건축 모습(뵂부분)을 아펜젤러가 직접 촬영했다. 고딕양식의 교회는 언덕이 있는 곳이나 주변 지역보다 높은 곳에 지어 교회의 위치를 상대적으로 잘 보이게 하려는 전통이 있다. 고딕양식 건축은 한국의 전통 관념과 충돌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공

아펜젤러 선교의 특징 중 하나는 권서인들과 함께 활동했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곳에 파송된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 보고서에서도 드러난다. 중국과 일본, 한국 등 여러 지역에서 복음이 전파된 것은 현지 권서인들의 희생적 역할이 크다. 아펜젤러는 선교본부의 허락을 받아 권서인 창씨와 최씨를 이북 지역 선교를 위해 파송했다. 최씨는 황해도와 평양 지역을 순회했고 창씨는 평양과 의주를 순회했다.

권서인 창씨를 이북 지역에 파송한 지 5개월이 지난 1888년 4월 6일, 창씨는 험난한 선교 여행을 끝내고 돌아왔다. 그는 최소한 16명의 사람들이 세례를 기다리고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아펜젤러에게 전했다. 창씨는 복음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4일 동안 감옥에 갇혀 생명의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아펜젤러는 세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당장 만나러 가기로 결정했다. 4월 17일, 이북 지역 선교 여행에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권서인 창씨가 동행했다. 이들은 선교를 위해 2414㎞라는 긴 여행을 계획했다. 아펜젤러는 순회 여행을 계획하면서 장로교, 감리교 선교부가 연합해 한반도의 복음화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는 고무적 감정을 그의 일기에 술회했다.

이북 지역 순회 선교의 시작

당시 한국은 선교가 금지돼 있었고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과 반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선교사들의 선교 여행은 언제든지 위험한 상황이 도사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북 지역은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했고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웠던 곳이었기에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행동 하나 하나에 주민들이 민감하게 반응할 것으로 예상했다. 다행히 이들은 내지 여행이라는 목적으로 한국 정부의 여행 협조문을 받아 그나마 걱정을 덜 수 있었다. 미국 공사 딘스모어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여행이 선교 여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안전이 최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의주에 도착한 아펜젤러 일행은 한옥에 도착했다. 8m×16m 크기의 방에서 18명의 남자들이 모였다. 아펜젤러는 이들에게 설교하며 복음을 전했다. 이들 중 8명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기로 작정했다. 언더우드는 8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권서인은 이들에게 신앙생활을 가르쳤다.

선교팀은 그 누구보다 이상적인 선교를 펼쳤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이른바 ‘학생 선교 자원 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출신이다. 미국의 2차 대각성 운동의 주역인 D. L. 무디의 영향아래 학생 선교 자원 운동이 일어났고 이를 통해 동북아시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복음을 위해서 어디든 간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수많은 인재들이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고 선교사로 자원했다. 학생 선교 자원 운동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선교라는 커다란 기치 아래 교파를 초월한 에큐메니컬(연합)정신, 현지 평신도 사역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신은 이북 지역 선교 여행에서도 잘 드러났다. 이북 지역 선교는 한국인 권서와 연합해 선교했다.

이북 지역 순회 선교의 금지

이들은 평양을 향해 선교 사역을 하는 도중 딘스모어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는 “미국인의 거주는 허락이 되지만, 거주가 허락 된다고 한국인들에게 기독교 사상을 전파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한국 정부는 선교를 금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딘스모어는 이들이 복음을 전파하고 세례 주는 것을 멈출 것을 주문했고 나중에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시기가 올 것이라는 내용으로 편지를 보냈다. 딘스모어의 입장은 선교 금지가 아니라 자국민 보호 차원에서 신변 보호가 급선무였다.

이와 관련한 다양한 연구 중에는 딘스모어를 비롯해 초기 미국 공사인 푸트와 후임 공사 포크는 선교를 반대하는 주한 미국 공사라는 언급이 있으나, 이들의 입장은 개인적인 감정으로 선교를 반대했던 것이 아니라 자국민 보호라는 차원에서 주문했던 측면이 더 강하다. 미국 외교부 자료에는 한국에 주재했던 미국 공사를 비롯해 중국, 일본의 공사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강조했던 공문서와 문건들이 발견된다. 동북아시아에서 반기독교운동 등이 전개되거나 사건이 일어나면 각 나라에 주재한 미국 공사들에게 하나의 사례로 공유되어 각 나라에 파송된 기독교 선교사들을 주의해서 살필 것을 주문했다.

순회 선교 금지의 원인과 영향

딘스모어의 이 같은 주문에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는 사명으로 선교 여행을 강행하려 했다. 그들은 딘스모어에게 지혜롭게 선교 여행을 하겠다고 답장했다. 하지만 그들이 선교 활동을 재개하려고 할 때 한국 장로교 선교부에서 전보가 날아들었다. 서울에 예상치 못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기에 급히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평양을 끝으로 결국 서울로 돌아갔고 5월 4일 도착했다.

아펜젤러의 일기에는 심각한 문제를 기록하고 있다.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이 고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주교회(현 명동성당)를 계속 지을 것이라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미쳤던 영향은 예상보다 컸다. 모든 서양인들의 선교 활동이 금지됐다. 고종이 명동성당 건축을 반대했던 이유는 왕이 거주하는 궁을 내려다보는 높은 건물이 지어진 사례는 지금까지 없었고 천주교 선교사들이 프랑스라는 열강의 힘을 입고 위압감을 드러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금교령이 내려진 가운데 서구 공관이 아닌 종교 건물을 지어 고종의 심기를 건드렸던 가톨릭의 결정은 결국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을 제한시켰고 이후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스크랜턴의 시병원, 베델 예배당의 주일 예배와 기도 모임마저 중지시키는 초유의 사태로 번지게 했다.

소요한(명지대 객원교수·교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