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랄드빛 파도가 밀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말레콘 방파제. 영화 속에서나 접할 법한 클래식한 1950년대의 ‘올드 카(Old car)’. 굵게 말려 향미 풍부하게 타들어가는 시가와 사탕수수즙을 발효시킨 독한 럼주. 캐러비안 해풍을 맞고 자란 원두로 뽑아낸 진한 에스프레소.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즐겼던 민트향의 칵테일 모히토와 그가 즐겨 찾던 카페 엘 플로리다타. 헤밍웨이가 묵었던 고풍스러운 암보스 문도스 호텔과 그가 글을 썼던 고급스러운 별장. 거리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아프로쿠반(Afro-Cuban) 음악과 거리의 악사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스페인 식민시대의 파스텔풍 집이 밀집된 트리니다드의 이국적 풍경. 20세기 무장혁명의 아이콘 체 게바라의 유적이 보존된 산타바바라.
고온다습한 날씨에 잦은 폭우. 비온 뒤의 퀴퀴한 냄새. 대로만 벗어나면 바로 나타나는 비포장도로. 올드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커먼 매연. 살 만한 공산품이 거의 없고, 생필품마저 부족한 상점들. 내국인과 외국인 간 차별적인 환율. 시설이 전반적으로 기대 이하인 카사(여행자용 민박). 걸핏하면 끊기는 수돗물. 호텔이 아니고선 어딜 가든 거친 음식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레퍼토리만 반복되는 거리 음악. 형제 세습의 희한한 정치체제. 아바나 공항부터 시작되는 체제 미화성 슬로건과 벽화들. 그런 구호들 너머 부서진 채 방치돼 있는 아슬아슬한 건물들과 가난한 삶의 흔적.
3년 전 목격한 쿠바의 이면적 풍경이다.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쿠바에 대한 향수를 가진 이들이 많지만 그곳을 다녀온 뒤에는 실망했다고 얘기하는 이들이 많다. 너무 못사는 모습에 혁명에 대한 향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한다. 이데올로기 이면의 기본적인 생활이 해결되지 않는 불편한 진실들. 미국의 경제봉쇄 때문이라지만, 그게 이유인지 변명인지는 헷갈린다.
쿠바가 최근 미국과 국교 정상화의 길로 들어섰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는 경우가 많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쿠바 인민의 삶이 나아지길 바란다.
손병호 차장 bhson@kmib.co.kr
[한마당-손병호] 쿠바의 이면
입력 2015-01-26 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