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U15 9920-6200’ 지난 23일 오전 10시 부산 남구의 한국거래소 온실가스 배출권 시장. 운영팀 이영우(37) 대리가 응시하던 모니터에 이 같은 알파벳과 숫자 조합이 떴다. KAU는 온실가스 1t을 뜻하는 단위다. 15는 2015년을, 9920-6200은 거래 가격과 거래량을 의미한다. 풀어보면 ‘6200t의 온실가스 배출권을 t당 9920원에 사겠다’는 주문이다. 온실가스 배출권 시장에 구매자가 등장한 것이다. 이 대리는 초조하게 판매자를 기다렸다. 잠시 뒤 모니터에 ‘KAU15 8930-1000’이 올라왔다. 기다리던 판매자는 나타나지 않고 구매자가 또 나왔다. 배출권 t당 8930원에 1000t을 사겠다는 주문이다. 이날 배출권 매수 주문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팔겠다는 기업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고 정오쯤 장이 마무리됐다. 5일 연속 거래량 ‘0’을 기록했다. 배출권 시장을 총괄하는 한국거래소 이수재 팀장이 “오늘도 조용하네요. 보여드리기 민망하네요”라며 멋쩍게 웃었다.
세계가 주목하는 배출권 거래시장
배출권 거래시장은 주식시장처럼 온실가스 배출권을 놓고 팔려는 기업과 사려는 기업이 종목·수량·가격을 협의해 매매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정부에서 할당받은 온실가스 배출량이 넉넉한 기업은 이를 판매하고, 부족한 기업이 사는 시스템이다.
우리나라의 국가 단위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시장은 지난 12일 개장했다. ‘아시아 최초’ ‘비서구권 최초’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유럽연합(EU)과 서유럽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국가 단위로 시장이 개설된 건 우리나라뿐이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일부 지방자치단체가 자율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호주는 최근 국가 단위로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시장을 개설하려던 방침을 철회했다. 대부분 국내 산업계의 강력한 반발에 막혀 국가 단위 시행은 엄두도 못내는 실정이다.
‘한국에서는 어떻게 운영될까.’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개장 첫날 1190t이 거래되면서 활성화될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갖게 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50t으로 급감하더니 이후 100t과 40t을 오갔고 19일부터는 아예 거래가 끊겼다. 대기업 499곳과 수출입은행·산업은행·중소기업은행 등 502개사가 참여하고 있는 시장임을 고려하면 초라한 실적이다.
마뜩찮은 기업들…눈치만 봐
기업들은 ‘왜 우리나라가 앞장서서 시작했나’라는 불만을 갖고 있다.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모두 이익을 봐야 시장이 운영되는데 양측 모두 정부 때문에 억지로 한다는 분위기가 강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산업계에 미칠 피해가 정확히 파악조차 안 돼 있다” “제도가 산업 전반의 발전 저해로 이어지면 곤란하다” “2020년까지 배출할 전망치 대비 온실가스를 30% 줄인다는 정부 방침이 과하다”라면서 불만을 쏟아냈다.
이런 분위기는 온실가스 감축 실적이 좋은 기업들을 주저하게 만들고 있다. 철강 분야 A사 관계자는 “배출권을 팔 여력이 있더라도 나섰다가 다른 기업들로부터 ‘공적’으로 지목될 수 있어 주저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발전·에너지업계 B사 관계자는 “대상 업체 대부분이 할당량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상태”라며 “여력이 있는 업체라도 향후 거래 동향을 보기 위해 뜸을 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정밀화학 분야 C사 측은 “새로운 시장이라 배출권 가격이 어떻게 튈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내재돼 있다”며 “만약을 대비해 할당량이 남아도 팔지 않고 일단 내년으로 이월하는 것으로 방침을 정했다”고 했다. 철강 분야 D사의 담당자는 “일단 경쟁사가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자는 게 경영진의 의견”이라며 “신중해서 나쁠 게 없다는 것이 업계 전반적인 분위기”라고 전했다.
“새로운 기회” vs “새로운 부담”
거래소 관계자는 “기업들이 배출권 거래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관심 없는 척하는 것”이라며 “실질적인 거래는 이뤄지지 않더라도 관련 전화가 하루에 100통이 넘는다”고 설명했다. 기업들의 관망이 끝나면 시장이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하는 눈치다.
기업들은 최근 정부에 배출권을 늘려 달라고 요구했다. 정부는 2015년부터 3년간 국내 525개 기업의 배출권 할당총량으로 15억9800t을 제시했다. 이는 기업들이 요구한 20억2100만t보다 4억2300만t 적은 규모다. 이 때문에 243개 기업이 환경부에 배출권 할당에 대해 이의신청을 낸 상태다. 거래소 관계자는 “도입 초기의 혼란이 잦아들면 기업들이 자신들의 이해에 맞게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정부는 ‘어차피 해야 한다면 선제적으로 하자’는 입장이다. 세계에서 7번째로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우리나라를 향해 국제적 압력이 거세지고 있어서다.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려는 노력은 자연스럽게 저탄소산업 육성으로 이어지므로 경쟁력을 높이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환경부 관계자는 “유럽연합(EU)도 배출권 거래제 이후 저탄소산업 관련 특허 건수가 배 이상 증가했다”면서 “(EU의 경우) 온실가스를 줄이는 기술을 무료로 전수해주고 있어 기업들의 경제적 부담도 적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
[한·중·일 뭉쳐야 숨쉰다] 장은 섰는데 눈치만… 5일째 거래량 ‘0’
입력 2015-01-27 0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