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맹주 사우디 국왕 타계… ‘느린 개혁’ 이어질 듯

입력 2015-01-24 03:53
90세를 일기로 23일(현지시간) 타계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국왕(왼쪽)이 2010년 11월 미국 방문에 나서기 전 수도 리야드에서 당시 살만 왕세제(맨 오른쪽)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압둘라 국왕의 이복형제인 살만은 이날 왕위를 계승했다. AP연합뉴스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국왕이 23일(현지시간) 타계했지만 사우디의 대내외 기본 정책들은 이전과 다름없이 그대로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왕위를 계승한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80) 왕세제도 국영TV로 중계된 대국민 연설에서 “전임 국왕들과 마찬가지로 같은 접근법을 유지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는 급격한 변화보다는 기존의 이슬람 원리주의에 근거한 보수적 색채가 강한 사회체제를 계속 이어가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느린 개혁’ 고수할 듯, 유가 하락 및 IS 대응이 과제=AP통신과 로이터통신 등은 살만 국왕이 왕세제 시절 요직인 부총리 겸 국방장관을 지내며 사실상 국왕대행 역할을 해왔다고 보도했다.

때문에 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대미 관계나 내부적인 주요 정책기조가 그대로 유지될 것으로 봤다. 대표적 친미 국가인 사우디는 그동안 중동에서 미국의 핵심 우방 역할을 해왔고, 내부적으로는 ‘제한적인 개혁’ 정책을 펴왔다.

2007년 위키리크스를 통해 공개된 미국 외교전문에 따르면 살만 국왕은 “개혁은 보수 전통주의자들이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는 그가 보수적 성향이 강한 지도자임을 엿보게 한다. 하지만 사우디의 극우보수적인 사회체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이 갈수록 커지고 있어 이전보다 더 개혁적으로 나서지 않을 경우 대내외 저항에 직면할 수도 있다. 사우디는 최근에도 이슬람을 비판한 자국 블로거에 태형을 집행해 ‘전근대적인 국가’라는 비난에 휩싸였었다.

유가급락 속에서 왕위가 계승돼 불안 요소도 적지 않다. 사우디는 유가가 배럴당 25달러까지 떨어져도 버틸 수 있다면서 다른 산유국들의 ‘감산(減産)’ 요구를 거절해 왔다. 하지만 저유가가 장기화되면 재정악화로 사회 불안 가능성도 있다. 특히 그동안 ‘아랍의 봄’ 여파를 시혜적 복지정책으로 틀어막아왔지만 이런 ‘돈의 정치’가 한계에 다다를 수 있다.

다만 압둘라 국왕 사망 소식에 뉴욕상업거래소(NYMEX)의 3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가격이 시간외거래에서 3.1% 치솟는 등 사우디가 감산 체제로 돌아설 것이란 관측도 있다.

중동에서는 사우디와 같은 이슬람 수니파인 ‘이슬람국가(IS)’가 부상하고 있고, 앙숙인 이란은 ‘핵 협상’을 고리로 미국과 밀월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때문에 살만 국왕이 IS의 세 확장을 막아내는 동시에, 미국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해놓지 않으면 이슬람의 종주국이자 중동의 맹주 자리를 놓칠 수도 있다.

◇새 국왕도 80대, 노인정치 우려도=사우디는 1932년 사우디 왕조를 연 압둘아지즈 이븐사우드 초대 국왕의 유언에 따라 형제세습으로 왕위를 계승하고 있다. 압둘라 국왕의 이복동생인 살만 국왕은 사우디 정부의 요직을 차지한 ‘수다이리 7형제’ 중 한 명이다.

수다이리 형제는 초대 국왕의 8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7형제로 직전 국왕인 파흐드 국왕을 비롯해 국방·내무장관 등을 배출한 혈통이다. 다음 순위 왕위 후계자는 지난해 3월 부왕세제로 임명된 무크린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70) 제2부총리다.

살만 국왕의 통치 기간을 감안하면 차기 국왕 역시 80대 전후의 나이가 돼야 재위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왕실의 고령화가 사우디의 개혁을 막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외신들은 이를 두고 ‘고령정치(gerontocracy) 국가’라고 꼬집기도 했다.

손병호 기자 bhson@kmib.co.kr

압둘라 국왕은 누구

23일(현지시간) 타계한 사우디아라비아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국왕은 1924년생으로 2005년 이복형인 5대 국왕 파흐드 국왕이 별세하면서 그해 8월 1일 81세의 나이로 제6대 왕위를 물려받았다. 압둘라 국왕은 미국의 각종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동참하면서 사우디를 미국의 핵심 우방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하지만 중동 현지에서는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 협력한다는 비난도 끊이지 않았다.

그는 집권 10년 동안 여성의 권익 증진에 힘써왔다. 2013년 1월 국회에 해당하는 슈라위원회의 위원 150명 중 20%인 30명을 여성으로 임명했다. 2011년 '아랍의 봄' 때에는 여성의 참정권을 승인했고, 2012년엔 처음으로 여성을 올림픽에 출전토록 허용했다. 올해부터 주식시장을 외국인에게도 개방하는 등 이전 사우디 국왕들에 비해 개방적인 정책을 펴왔다.

손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