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기 내란선동 유죄] ‘내란 실행하겠다는 확정적 합의’ 있어야 음모죄

입력 2015-01-23 03:20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석기(53) 전 통합진보당 의원의 상고심에서 내란음모죄가 성립하기 위한 구체적 요건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1990년대 말 내란죄와 음모죄 성립 요건에 대해 따로 설명한 대법원 판례는 있지만 ‘내란음모’에 대한 판례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내란을 실행하겠다는 확정적인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 한 내란음모죄를 적용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한 지방의 평온을 해할 정도의 폭동이 목적”=대법원은 2013년 5월 회합 당시 이 전 의원 발언이 ‘국헌 문란을 목적으로 하는 폭동’을 목적으로 두고 있다고 규정했다. 이 전 의원은 회합 참석자 130여명을 상대로 전쟁 발발 시 전국적으로 통신·유류·철도·가스 등 주요 국가 기간시설을 파괴하는 행위 등을 준비하라고 촉구했었다.

특히 조직적 폭력행위를 강조한 만큼 내란죄 성립에 필요한 ‘한 지방의 평온을 해할 정도’에 이르렀다는 게 대법원 판단이다. 실제 전쟁 상황에서 실행에 옮겨질 경우 대한민국 정부의 전쟁 대응 기능이 무력화돼 체제가 전복될 수 있는 수준의 발언이라는 것이다.

◇“막연한 합의, 단순 의견교환은 내란음모 아니다”=그러나 대법원은 이 전 의원의 그런 발언이 있었다 하더라도 회합을 내란음모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음모의 범위를 엄격하게 해석한 것이다. 대법원은 “적어도 내란음모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공격 대상과 목표가 설정돼 있고, 실행 계획에 있어서 주요 사항의 윤곽을 공통적으로 인식할 정도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최소한의 요건이 갖춰지지 않았다면 ‘내란’에 관한 음모인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회합의 구체적 분위기도 내란음모와 거리가 멀다고 봤다. 대법원은 “참석자 중 일부가 아이를 데리고 오거나 피고인 김근래가 늦게 온 점 등은 내란을 모의하는 사람들의 태도로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일부 참석자가 폭력행위에 회의적 반응을 보이기도 했던 점 등도 고려됐다.

이는 앞선 항소심 재판부 판단과 같은 맥락이다. 2심을 맡았던 서울고법 형사9부는 회합 참석자들이 폭력적 방안을 실행하기 위한 추가 논의나 준비행위를 했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내란음모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었다.

오히려 대법원은 음모의 범위를 확대 해석할 경우 생길 문제점을 지적했다. 대법원은 “범죄를 실행하기로 막연하게 합의한 경우나 특정 범죄에 대해 단순히 의견을 교환한 경우까지 처벌한다면 국민 기본권인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대법원은 “내란음모는 실질적인 위험성을 수반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실행 욕구 유발·증대시킨다면 내란선동”=내란선동의 범위는 상대적으로 넓게 해석했다. 선동은 음모와는 달리 선동자의 일방적 행위다. 대법원은 “내란에 이를 정도의 폭력적 행위를 선동하고, 피선동자에게 내란 결의를 유발하거나 증대시킬 위험성이 인정되면 내란선동으로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내란 시기와 장소, 대상, 방식, 역할 분담 등은 내란선동 단계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될 필요가 없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이 전 의원 발언을 내란선동으로 보기에 충분하다고 대법원은 판단했다. 대법원은 “이 전 의원의 발언은 북한 도발이 계속되던 상황을 참석자들이 전쟁 상황으로 인식하게 하고, 내란의 결의를 유발하거나 증대시킬 위험성이 충분하다”고 했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