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김상옥(1890∼1923) 의사의 서울 시가전 승리 92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22일 서울 종로구 효제초등학교 강당에서 열렸다. 김 의사는 1923년 1월 일본 경찰 1000여명을 상대로 시가전을 벌이다가 자결한 인물로 서울 동대문교회 성도였다.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이날 행사는 강흥복 동대문교회 목사의 기도로 시작됐다. 강 목사는 “김 의사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응해 야수 같은 일제와 1대1000으로 맞서 싸워 기대 이상의 승리를 거뒀다”며 “그는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우리에게 이토록 믿음으로 꽉 찬 위대한 지도자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며 “김 의사처럼 확실한 젊은 일꾼을 많이 배출하게 해주시고 통일을 앞당겨 달라”고 기도했다.
서울 출신인 김 의사는 3·1운동이 일어난 직후인 1919년 4월 서울 동대문교회에서 항일단체인 ‘혁신단’을 조직했다. 이듬해에는 중국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좌진(1889∼1930) 장군 휘하의 인물들과 암살단을 만들었으며, 독립운동가 김구(1876∼1949) 이시영(1869∼1953) 등과도 교분을 쌓았다.
특히 1923년 1월 12일 식민통치의 상징과도 같던 서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열흘 뒤인 22일엔 권총 2정을 들고 서울 효제동 일대에서 일본 경찰 1000여명에 맞서 시가전을 벌였다. 당시 시가전에서 사살된 일본 경찰은 16명에 달했다. 김 의사는 3시간 넘는 시가전을 벌인 뒤 총알 한 알만 남자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겨 자결했다. 우리 정부는 김 의사의 공로를 인정해 1962년 3월 고인에게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追敍)했다.
김 의사는 독립운동 외에 민족계몽운동과 문화운동에도 헌신한 크리스천이었다. 그는 열아홉 살이던 1909년 소외된 청소년을 위한 학교인 동흥야학(東興夜學)을 설립했으며 일제상품 배척운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강 목사는 “김 의사는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동대문교회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신앙교육도 받았다”며 “민족의 살길은 오로지 하나님께 있음을 확신한 인물이었다”고 소개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감독인 여우훈 목사는 “김 의사는 의로운 삶을 온몸으로 보여준 인물”이라며 “오늘날 우리에게 그의 이름이 귀중하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에게 행동하는 애국애족의 본보기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행사를 주최한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관계자 외에도 동대문교회 성도들, 보훈처 및 광복회 관계자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정진태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장은 “오늘날 우리가 생존해 번영과 풍요를 누리는 것은 많은 선열들의 애국애족정신과 희생의 결과”라고 강조했다. 그는 “김 의사는 독립자금 수급, 다양한 의열투쟁 등을 통해 초인적 독립항쟁을 벌인 인물”이라며 “나라와 겨레를 위해 투쟁한 나라사랑의 표상과도 같다”고 말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日帝 간담 서늘케 한 의사의 가슴엔 뜨거운 신앙 있었다
입력 2015-01-23 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