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털 사이트에 ‘조선족’이라고 치면 살인, 범죄, 장기, 추방 등 부정적 키워드가 자동 생성되어 올라온다. ‘중국동포’라고 넣어도 청부살인, 욕설, 패싸움 등이 생성된다. 그만큼 중국동포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다는 얘기다. 2012년 오원춘 사건, 2014년 박춘봉 사건이 중국동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키우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중국동포는 19세기 중후반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한민족 일부가 만주로 이동하면서 형성됐다. 20세기 초반 들어선 일제의 경제적 침탈과 항일운동 등으로 엑소더스를 감행, 중국 둥베이(동북3성) 지방까지 넓혀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고국을 떠난 이들은 간도의 항일독립운동 시인 윤동주의 시 ‘십자가’에 나타난 것처럼 메시아를 기다리며 살았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그들은 낯선 땅에서 교회를 세우고 마을을 이뤘다.
그러다 1980년대 독립유공자 후손 영주귀국을 시작으로 가나안땅과 같은 남한으로 밀려들게 된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로는 경제적 이유 등으로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 2012년 기준으로 재한 중국동포가 44만7000명에 이르게 됐다. 이들 가운데 10명 중 4명은 공사현장 등 일용직(2010년 국가통계포털 인구 총조사 외국인 부문)인 것으로 조사됐다. 중국동포 대개는 서민층이나 차상위계층이다.
그런데 디아스포라였던 그들은 왜 어렵게 정착한 고국에서 배척받으며 살아갈까. 몇 사람의 범죄가 배척받는 이유의 전부인걸까.
성경은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4∼47)고 했다.
우리는 예수의 밥상공동체 마음으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최근 불거진 ‘어린이집 아동학대 교사 사건’ 등에서 알 수 있듯 대다수의 선량한 보육교사가 자신의 직분에 충실한데도 악행을 저지른 한두 명의 교사로 인해 교사 전체가 오해를 받는다. 중국동포에게도 우리 사회가 몇몇 범죄자의 행위를 전체의 행위로 연결시키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지 않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중국동포에 대한 시선, 일반화의 오류
지난주일 오전 서울 남부순환로 중국동포교회(김해성 목사) 1층 주방은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다. 6∼7명의 봉사자들이 주일 점심 준비를 위해 부산하게 움직였다. 이날 준비한 점심은 400∼500인분. 대형 솥에 쌀밥이 김을 내며 익어갔다. 겉절이와 시금치는 차례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내주기 편하도록 정리되어 있었다. 동탯국도 솥에서 펄펄 끓고 있었다.
남성 봉사자 두엇은 주방 한쪽에서 잔반통 위치를 잡고 있었다. 주방 여성 봉사자가 무거운 것을 들라치면 얼른 받아 옮겨주는 것도 그들 몫이었다. 봉사자 모두 중국동포 교인이었다.
주방 배식구 밖에선 식사 대기자가 교회 문밖까지 이어졌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우중충한 검은 점퍼류를 입은 이들은 대부분 60대 이상이었다. 그 시각 5층 예배당에선 김해성(55) 목사가 3부 예배 설교 중이었다. ‘사명자로 우뚝 서자’는 말씀이었다. 200여명의 교인들로 꽉 찬 예배당은 열기가 넘쳤다. 김 목사는 매주 1∼5부 설교를 이어간다. 30년 가까이 중국동포를 위해 헌신하는 김 목사는 중국동포 및 이주민에게 존경의 대상이다.
예배가 끝날 무렵인 낮 12시. 1층에선 민선희(66) 부목사가 감사기도를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줄이 길어져 먼저 배식하지 않으면 안 됐기 때문이다.
먼저 줄서는 이들은 1, 2부 예배를 봤거나 인근에 사는 비신자 동포들이다. 교회건물 4층 이주민쉼터에서 생활하는 이들도 섞여 있다. 이들은 다닥다닥 줄을 좁혀 주방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기도가 시작되자 그들은 머리를 숙였다. 더러 딴청 하는 이들도 있었다.
배식 창구가 열리자 이들은 밀듯이 앞으로 나가며 급식을 탔다. 주방 봉사자 전찬옥(61) 최정애(57) 이동하(64) 이성일(61) 성도의 손길이 바빠졌다.
민 목사는 “이 식당은 365일 하루 세끼 쉴 새 없이 돌아간다”고 밝혔다. 주일 외에는 ‘이주민무료급식소’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6층짜리 이 건물은 2층 ‘이주민의료센터’, 3층 ‘지구촌사랑나눔’ 법인 사무국, 4층 ‘이주민쉼터’, 5층 중국동포교회, 6층 세계선교신학대학으로 사용된다.
이 가운데 교회는 중국동포 사회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신앙생활만이 아닌 서울 서남부지역 15만여명 중국동포 사이에 주민센터와 같은 기능도 하고 있다. 마치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대형 한인교회 역할과 같다.
한데 교회는 신실한 이들로 채워진 곳만은 아니다. 어떤 이는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찾고, 또 어떤 이는 막노동 일자리라도 얻을 양으로 들어선다. 때문에 쉼터와 급식소에선 알코올 중독자 등의 소란이 이어지고 심할 경우 폭력 사태를 낳기도 한다. 도난 사건 등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후원기관 등에서 들어온 선물을 나눌 경우 서로 먼저 집으려는 욕심 때문에 뒤엉키고 끝내 싸움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급식소와 쉼터를 책임지고 있는 민 목사는 “한국에 들어오기 전 신앙생활 하시던 분들과 여기 들어와 입문하신 분들 간 생활태도의 차이가 크다”며 “호구지책으로 교회를 이용하는 분들이 마음의 문을 안 열고 사고 칠 경우 우리가 헛수고 하는 것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일 밤 급식 땐 이런 일이 있었다. 줄을 서 밥 차례를 기다리던 60대 동포 한 사람이 왜 늦게 주냐며 욕을 하며 소란을 피웠다. 얼굴엔 취기가 있었다. 그러자 민 목사가 단호하면서도 큰 목소리로 말했다.
“조용히 하세요. 여기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민 목사의 우렁찬 목소리였다. 취객은 식탁이라도 뒤엎을 기세처럼 보였으나 금세 어린 양으로 변했다. 민 목사의 눈을 피하며 “네”하고 얌전해졌다. 영의 명령을 들은 듯했다.
취객의 소란이 계속될 경우 급식소 배식창구 문을 닫기도 한다. 어느 날 한 이용자가 우거짓국이 시원찮다며 반복되는 행패를 부리자 민 목사가 배식창구 문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모두를 향해 외쳤다.
“여러분이 드시는 이 채소는 한 비빔밥 업체 회장님이 15년째 대고 있습니다. 배추 시든 거 있다고 ‘우리가 돼지 새끼냐’고 하시는데 감사하며 먹어야 합니다. 상인과 농민의 눈물이에요. 여기까지 배송비만도 3만원입니다. 후원자가 전부 부담하고 있어요. 이해하시겠어요.”
그 후 소동은 동포들에 의해 자체 규율됐다. 이처럼 단호하게 된 배경에는 2013년 술 취한 동포가 급식소에 불을 지른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방화범이 죽고 10명이 다치는 참사였다. 방화범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동포였다. 교회는 그를 용서했고 그 가족에게 장례비까지 지원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서울광염교회 조현삼 목사 등이 불에 탄 급식소와 병원 등을 긴급 지원해 오늘과 같은 시설을 갖추게 됐다.
신앙 접한 바 없어 ‘감사’가 낯설다
중국동포들에게 ‘감사’ ‘은혜’ ‘나눔’이란 말은 이방의 언어다. 급식을 먹으면서도 왜 감사해야 하냐는 표정일 경우가 많다. 사회주의 생활방식 탓이다. 이들은 교회 생활에서도 이 말을 낯설어한다. 초신자에게 감사헌금과 십일조는 도무지 이해 못할 단어다.
그러다 보니 예배 시간에는 많은 사람이 졸거나 딴 짓이다. 아니면 큰 소리로 ‘당당하게’ 예배 중 전화를 받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신앙을 접한 바 없으므로 영성을 채우지 못했고, 공동체를 위한 배려 또한 훈련받지 못했다.
그런 그들에게 저임금, 3D 업종 종사 그리고 체임과 무시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모양이다. 20일 서울 대림동 양꼬치집에서 만난 박희순(가명·53)씨는 “우리가 이런 사회(자본주의)에 살아본 적이 없어서 마음속 갈등이 심하다”며 “한국 사람들에게 배울 점도 많고 섭섭한 점도 많다”고 조심스레 얘기했다. 살인사건 얘기는 꺼내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박씨를 포함한 중국동포들은 요즘 위축돼 있다. ‘외국인 혐오’가 세계적으로 고조된 상황이라 더욱 그렇다. 지난주일 교회에서 만난 성충현(가명·58)씨는 “한국사람 많은 데선 (조선족 어투가 나올까 봐) 일부러 말을 안 한다”며 “조선족은 성정이 온화하여 그러하지(나쁘지) 아니했는데 돈 벌러 한국 들어와서 다 버려놨다”고 한탄했다. 요즘 경기가 나빠 일자리가 끊겼다는 그는 혹 작은 실수라도 할까 봐 술도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이덕남(71) 집사는 2005년 헤이룽장성에서 들어왔다. “고향에선 두레 풍습을 잘 지키던 민족이었다”는 그는 큰아들과 손자가 장애를 갖고 있다. 여동생의 권유로 예수를 믿게 됐다. “이 낯선 서울에서 교회가 없었더라면 어찌 살았을까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 집사는 “(살인 사건을 일으킨) 몇몇 때문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고 덧붙였다.
영성 깃들게 하는 건 한국교회 몫
며칠 간 중국동포교회와 대림동·가리봉동의 중국타운을 살피며 많은 사람과 얘기를 해본 결과 그들은 한민족 피를 그대로 지닌 동포였다. 성질 급한 점도 같았다. 극악한 살인자들은 ‘우리’와 구별되는 사탄이었을 뿐이다.
다만 그들은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평생을 살아왔기에 자본주의식 노동에 익숙하지 않았다. 또 고향에서와 달리 빈부 격차를 처음 느낀 데서 오는 당혹스러움으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우리 사회 아웃사이더가 됐다. 아니 그렇게 비쳐졌다. 그 아웃사이더는 어디까지나 타자의 시선, 즉 미디어 등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가 아닌가 싶다. 이는 범죄율만 봐도 그렇다.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실제로 외국인 범죄율은 내국인에 비해 절반 수준밖에 되지 않지만,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범죄가 언론에 더 많이 노출되고 이를 반복적으로 접한 사람들이 외국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감사, 은혜, 나눔의 삶을 위한 영성이 깃들게 하는 일이 한국 교계가 할 몫이었다. 이집트를 찾은 구약의 사람들과 같기 때문이다. 중국동포. 북방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아닐까 생각했다.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
[미션 르포] 감사·은혜·나눔, 그들은 아직도 낯설다
입력 2015-01-24 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