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성기철] ‘비운의 왕자’ 김평일

입력 2015-01-23 02:10

1972년 4월 15일, 북한 김일성은 자신의 회갑연에서 하객으로 참석한 빨치산 혁명 1세대 원로들에게 권력 후계 얘기를 꺼냈다. “내게 아들들이 있는데 누가 다음을 이어야 할지….” 이에 다섯 살 연상이자 김일성의 신임이 각별하던 최현이 “당연히 장손이 이어야지요. 다른 누가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김일성이 “다른 의견 없느냐”고 물었으나 긴 침묵만 흘렀다. 장손이란 김정일을 가리킨다. 당시 원로들 사이에선 김평일에 대한 평이 좋았으나 최현의 선제 발언에 아무도 반대의견을 내지 못했다. 김정일 30세, 이복동생 김평일 18세 때의 일이다.

김평일은 김일성이 본처 김정숙(김정일의 어머니) 사후에 재혼한 김성애가 낳았다. 어릴 적부터 똑똑하고 외모가 준수해 김일성의 사랑이 각별했다. 김일성대학에 재학 중이던 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으로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군 입대를 독려하는 연설을 한 뒤 자진 입대해 아버지로부터 크게 칭찬받았다. 김정일은 이런 점을 시기해 자기더러 형이라 부르지도 못하게 할 정도로 거리를 뒀다.

김평일은 고급군관교육을 받는 등 군 경력을 쌓았다. 이에 김일성은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 지명된 80년 이전까지 ‘당은 정일, 군은 평일’에게 물려주는 방안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정치권력은 냉엄한 것. 후계자 수업을 받던 김정일은 이복동생을 동유럽으로 사실상 유배 보냈다. 유고 주재 북한대사관 무관으로 나갔다가 88년 헝가리 대사를 맡은 이후 불가리아와 핀란드 대사를 거쳐 98년 이후 17년간 폴란드 대사로 근무해 왔다.

김평일이 올 들어 체코 대사로 이동한 것으로 확인됐다. 폴란드에 오래 머물러 온 그가 세력화를 시도할까 두려워 김정은이 삼촌을 전보 조치했을 것이라는 게 우리 당국의 분석이다. 같은 뿌리인 ‘백두혈통’ 피붙이가 두려운 모양이다. 이복형인 김정남이 외국을 떠돌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북한이 숙질간, 형제간에 목숨 걸고 왕위쟁탈전을 벌인 조선시대를 연상케 하는 왕조국가임을 새삼 확인해준다.

성기철 논설위원 kcs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