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의 ‘황산벌’(2003)에 나온 주연배우가 누구였는지 기억나시는지. 백제 계백 장군 역의 박중훈과 신라 김유신 장군 역의 정진영? 기억이 가물가물한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거시기’ 역할로 나왔던 이문식은 어떤가. 영화를 재미있게 본 관객이라면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법하다. ‘빛나는 조연’ 이문식의 연기는 누구도 쉽게 흉내 내기 어려운 코믹 명품 연기였다.
연극무대에서 무명배우로 오랫동안 활동한 이문식은 영화 ‘초록물고기’ ‘돈을 갖고 튀어라’ ‘공공의 적’ 등에서 얼굴을 알렸다. 코미디연극 ‘라이어’에서 질펀하게 수다를 늘어놓은 연기를 바탕으로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준익 감독은 당시 이문식을 캐스팅한 이유에 대해 “그가 나오는 순간 관객들은 저절로 웃기 때문에 배역 설명을 따로 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조연배우의 화려한 계보
출연 분량은 적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조연배우는 수두룩하다. ‘넘버 3’에서 강도식 역할로 출연한 안석환은 아직도 관객들 사이에 회자될 정도로 소름 끼치는 연기를 보여줬다. 안석환도 무명 연극배우로 오랫동안 활동한 경우다. 이후 승승장구해 연달아 영화에 출연하다 요즘은 드라마 ‘왕의 얼굴’에서 임금에게 아부하는 영의정으로 나오고 있다.
‘해적: 바다로 간 산적’에서 구수한 입담을 늘어놓은 박철민은 연극 ‘늘근 도둑 이야기’로 유명한 연극배우 출신이다. 좌중을 웃음의 도가니에 빠뜨리게 하는 즉석 애드리브가 그의 전매특허다. ‘왕의 남자’에서 거지로 출연한 유해진도 박철민과 비슷한 캐릭터. 유해진은 ‘해적’에서 수영을 하지도 못하면서 “음파∼ 음파∼”하며 해적단에 헤엄을 가르치는 장면으로 폭소를 자아냈다.
‘신라의 달밤’에서는 성지루의 조연 연기가 단연 돋보였다. 포장마차 주인으로 걸쭉한 입담을 과시했다. 성지루와 유해진은 연극연출가 오태석이 이끄는 극단 ‘목화’가 낳은 스타다. ‘친구’에서 건달 두목으로 부산 사투리와 함께 냉혈한 눈빛연기를 선보인 이재용은 지금 생각해도 오싹하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영화에 데뷔한 이종원도 연극배우 출신으로 색깔 있는 감초 역할을 도맡았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에서는 곽도원이 감칠맛 나는 연기로 새로운 조연배우의 출현을 알렸다. 이 영화에서 악역 검사로 나온 그는 거들먹거리면서 약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비굴한 캐릭터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건축학개론’의 조정석은 ‘납득이’라는 별명으로 빅 히트를 치고, 유연석은 수지의 나쁜 선배로 나와 욕을 먹어야 했다. 유연석은 ‘늑대소년’에서도 악역을 맡았다.
지난해 출연작 누적 관객 1위는 ‘명량’ ‘해적’ ‘타짜: 신의 손’ 등 6편의 영화로 3336만을 모은 김원해가 차지했다. 조진웅은 조연과 주연으로 맹활약을 펼쳤다. ‘명량’ ‘군도: 민란의 시대’ ‘끝까지 간다’ ‘우리는 형제입니다’ 등으로 2680만 관객을 기록했다. 여배우 라미란은 ‘국제시장’ ‘빅매치’ 등 4편에 출연했다. 이전의 조연이 다소 심각한 캐릭터였다면 요즘은 코믹 이미지가 대세다.
#오늘은 조연 내일은 주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에게도 단역과 조연의 시절은 있었다. ‘국제시장’으로 첫 1000만 클럽에 가입한 황정민은 연극배우 출신으로 ‘장군의 아들’ ‘쉬리’에서 단역으로 출연하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밴드 멤버로 조연을 맡았다. 갖가지 역할의 배역을 전전하다 제대로 된 주연은 전도연과 호흡을 맞춘 ‘너는 내 운명’에서 처음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는 자세로 스타 배우로 거듭났다.
한국영화 최다 관객을 기록한 ‘명량’(1761만)의 최민식도 눈물 젖은 빵을 먹던 시절을 겪었다. 연극무대에서 활동하다 ‘구로 아리랑’으로 영화에 데뷔한 그는 드라마 ‘아들과 딸’ ‘서울의 달’에서 조연으로 비로소 이름을 알렸다. ‘쉬리’에 이어 ‘해피엔드’로 인기를 얻은 최민식은 ‘파이란’ ‘올드보이’ ‘취화선’ ‘범죄와의 전쟁’ ‘신세계’ 등을 통해 국민배우로 등극했다.
캐스팅 1순위라는 송강호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단역으로 데뷔한 후, ‘초록물고기’ ‘넘버 3’ ‘조용한 가족’ 등에서 조연으로 활동하다 ‘반칙왕’으로 첫 주연을 맡았다. 충무로의 대세 류승룡은 넌버벌 퍼포먼스 ‘난타’에서 활동하다 ‘아는 여자’에서 단역으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이후 이런저런 작품에 조연으로 나오다 ‘최종병기 활’에서 카리스마를 내뿜는 연기로 스타덤에 올랐다.
‘실미도’에서 684부대 제1조장으로 나온 정재영은 지금은 주연배우로 떴다. ‘왕의 남자’에서 거지로 출연한 유해진도 스타가 되기는 마찬가지. ‘해운대’의 이민기는 ‘퀵’ ‘내 심장을 쏴라’ 등에서 주인공을 맡았고,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왕을 보필하는 도부장 역의 김일권도 ‘전국노래자랑’ ‘쎄시봉’ 등에서 주연배우로 올라섰다.
이들의 활약은 숱한 무명 배우들에게 “지금은 단역 내지 조연이지만 나중에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영화가 감동을 전하는 한 편의 드라마가 되기 위해서는 주인공뿐 아니라 조연들이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앙상블을 이뤄야 한다. 이는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그런 측면에서 ‘빛나는 조연시대’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
[‘명품 조연’ 누가 있나] 그 영화, 주연이 누구… 였더라?
입력 2015-01-31 0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