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 나는 성역 30주년을 맞아 안식년 연수교육차 독일에 체류하고 있었다. 대충 짐을 풀기도 전에 교인 한 분이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누가 장난을 쳤는지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한 감리교단 산하의 교회와 담임자라며 수십 명의 사진들을 올려놓았는데 우리 교회 이름과 내 사진도 있었다.
내용인즉 WCC에 속한 목사들은 십계명도 믿지 않고 용공성도 있다는데 목사님은 어떠냐는 질문이었다. 불쾌했다. 그야말로 모처럼 안식년을 맞아 부푼 꿈에 젖어 있는 사람에게 이따위 저질스러운 편집 사진과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 못마땅했다.
서운하기도 했다. 보수적인 교단에서 우리 교회로 이명해 온 것은 알았지만 지난 5년 내내 내 설교나 목회방침을 능히 경험했으면서도 이따위 농간에 부화뇌동하는 것이 영 실망스러웠다. 늘 성서에 기반을 둔 복음적 설교를 해왔다고 자부했는데, 외부 세력에 휘둘려 자기 목사를 의심하는 태도가 거슬렸다. 더욱이 일종의 초상권 침해의 죄까지 저지르면서 이런 ‘찌라시’를 만든 진영이 차라리 이단종파였으면 맘 편할 텐데, 혹여 보수정통을 자처하는 이들의 소행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들자 가벼운 전율까지 일었다. 어쨌든 나는 어디에서 날아온지도 모르는 독화살에 일격을 당한 셈이 되었고, 귀국해 보니 그 교인은 타 교회로 옮긴 상태였다.
물론 우리 교단은 WCC에 가입되어 있지만, 나는 솔직히 WCC에 대해서 잘 모른다. 부산 총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어느 단체이든 거기에 소속돼 있다고 해서 다 같은 통속이라며 도매금으로 넘기는 것은 온당치 않다. WCC에 적극 참여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분명히 과격한 신학에 경도돼 있거나 편향적인 태도를 보이는 인사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몇 가지 사실에만 집착해 WCC 전체를 함부로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때로 정직한 의심보다 어설픈 확신이 훨씬 더 위험한 법이다.
최근에 나는 ‘목사의 딸’이라는 책을 읽었다. 저자의 부친은 보수정통 교단에서 거목으로 추앙받는 분이다. 신구약 66권에 대한 주석을 써서 유명해졌고, 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이 여러 편 나올 정도로 훌륭한 분이다.
하지만 딸이 가정에서 지켜본 아버지는 지나치게 율법주의적이고 유교적 가부장제에 찌든 분이었다. 밖으로 드러난 것과 달리 그분 역시 나와 똑같이 깨지기 쉬운 질그릇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일종의 우상파괴 작업을 다름 아닌 딸이 해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마이클 캐진은 “영웅이란 결점이나 모순이 없는 삶을 산 사람이 아니라 그의 생활이 인간에게 가능한 지평을 좀 더 확대시켜 놓은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제아무리 출중한 영웅이라도 흠이 없을 수 없다. 그러기에 영웅의 이면에 가려진 어두운 그늘을 부끄러워하거나 감출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오히려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에 친근감마저 든다.
이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바리새적 율법주의나 형식적 위선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치열하게 반성해야 한다. 너무 쉽게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양분하는 현대판 영지주의도 경계해야 한다. 정통교리(orthodoxy)도 중요하지만, 정통체험(orthopathy), 정통실천(orthopraxis)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무늬는 정통보수인 것처럼 보이는 이가 윤리성은 엉망인 것을 볼 때가 있다. 그러기에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해야”(요일 4:1) 한다. 무엇보다도 신과 종교의 이름으로 증오와 저주, 분열을 부추기는 사이비 보수, 껍데기 정통은 이제 가야만 한다!
김흥규 목사(내리교회)
[시온의 소리-김흥규] 보수정통주의의 그늘
입력 2015-01-23 0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