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문학 최고 권위의 아쿠다카와상을 받은 재일동포 2세 작가 유미리(47). 그가 천착한 주제는 ‘가족’이었다. 그것도 ‘가족 트라우마’를 어두운 문체로 조명해왔다. 그가 2년 만에 낸 신작 ‘JR 우에노 역 공원 출구’는 기존 작품세계에서 벗어난 시도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노숙자가 소재다. 12년 전 구상했다는 소설이 이제야 나왔다. 2006년 노숙자 문제를 취재하러 갔다가 칠십대 남성 노숙자가 툭 던진 말이 목에 가시처럼 걸렸던 것 같다.
“당신에겐 있고, 우리에겐 없어.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 기분을 어떻게 알겠어.”
그건 ‘집’이다. 소설에선 노숙자를 이렇게 정의한다. “옛날에는 가족이 있었다. 집도 있었다. 자진해서 노숙자가 된 자도 없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이렇게 될 만한 사정이 있었다.”
소설의 화자이기도 한 주인공을 한국의 용산역 같은 우에노 역으로 내몬 사정은 뭘까. 왜 무대가 우에노 역일까. 우에노 기차역은 일본의 1960년대 고도성장기 농어촌에서 돈벌이를 위해 무작정 상경해 첫발을 내딛는 도쿄의 현관이다. 소설 속 나도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서른 살에 도쿄로 떠난다. 닥치는 대로 일해 번 돈을 부치며 20여년을 살았다. 현실은 그를 배반한다. 도쿄 자취방에서 대학생 외동아들 고이치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그 슬픔이 채 가기 전에 아내를 또 갑자기 잃게 된다. “집을 비운 이십여 년 간, 이 집에서 가족들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모른다”는 화자의 독백은 가족을 위해 살았으나 가족 사이에서 부재했던 우리 시대 가장의 초상화에 다름 아니다.
일왕과 같은 해에 태어났고, 왕세자가 태어난 해 아들을 얻었던 한 사내의 삶에 ‘고생 끝의 낙’은 오지 않았다. 그게 현실이다. 작가가 굳이 일왕을 끌어들인 건 국가의 부와는 상관없는 국민의 빈곤한 현실을 고발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소설에선 쉼표의 미학이 빛난다. ‘고이치는, 죽었다.’ ‘노력하는 것에, 지쳤다’ ‘겨울이, 힘들었다.’ 쉼표가 없어도 되는 자리에 들어간 쉼표. 말을 잇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지친 가장이 느끼는 고통의 표식이다. 이게 화자가 결국 죽음을 택할 것이라는 복선 같은 것이라는 걸 책이 끝날 때쯤 깨닫게 된다. 우에노 공원에서 5년여를 보내던 화자는 전철이 다가오는 지하철 황색선 위에서 마지막을 택한다. 소설에는 유난히 ‘소리’가 넘쳐난다. “빠앙, 덜컹덜컹, 덜컹덜컹덜컹, 덜컹, 덜컹….” 소리는 눈을 감은 자에게 가장 예리하게 다가오는 감각 아닌가. “눈을 감으면 소리는 소리가 나던 위치를 잃고 날아가기 시작하며 (중략) 소리와 함께 흔적 없이 빨려드는 기분이었다.”
소설은 국가가 돌보지 않은 산업화 역군의 삶을 일본 근현대사 속에 녹여낸다. 우에노 역이라는 무대 자체가 그렇고 1964년 도쿄 올림픽과 2020년 도쿄 올림픽, 2011년 동일본 대지진까지의 굵직한 사건이 주인공과 가족의 삶에 얽힌다.
노숙자의 삶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구체적인 취재의 산물이다. 그들이 우리와 다른 족속이 아니라 가족을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이 소설은 결국 가족이라는 주제의 확장된 버전인 셈이다. 김미형 옮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책과 길] 韓·日 다른 듯 닮은 우리 시대 가장의 초상
입력 2015-01-23 0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