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육아노동] 혈육의 정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손주병’ 골병

입력 2015-01-20 01:25 수정 2015-01-20 09:05
다섯 살 손자와 18개월 손녀를 키우는 이경숙(가명·59)씨의 하루는 길다. 함께 사는 아들 부부가 출근하면 두 아이 아침을 또 차려야 한다. 손자를 옷 입혀 어린이집에 보낸 뒤에는 손녀와 전쟁을 치른다. 집안에서 넘어지고 부딪치는 일이 잦아 잠시라도 눈을 뗄 수 없다.

아침 먹은 걸 겨우 치우고 나면 어느새 점심 먹을 시간이다. 시원하게 먹으면 좋으련만 손녀의 숟가락질은 한 시간이 걸린다. 손녀가 1∼2시간 낮잠 자는 오후가 유일한 자유시간인데, 이때도 이씨는 바쁘다. 쉴 틈 없이 청소기 돌리고 빨래를 한다. 잠에서 깬 손녀를 씻기고 나면 저녁식사를 준비해야 한다. 초등학교 교사인 아들 내외가 퇴근해 집에 와야 겨우 한숨 돌린다.

이씨는 손자를 생후 4개월부터 키우기 시작했다. 아들네와 살림을 합치기 전이었다. 주말에는 며느리가 아이를 데려갔지만 주중 5일은 주위 도움 없이 24시간 아이를 돌봤다. 엄마와 떨어져 있는 손자가 안쓰러워 돌 무렵까지 늘 업어 재웠다.

누가 봐도 끔찍한 손자 사랑은 이씨 몸에 무리를 안겨줬다. 손자는 또래보다 덩치가 커서 4개월 때 몸무게가 8㎏이나 됐다. 이씨는 지금도 손목 발목 허리 어깨가 쑤시고 아프다. 쉬는 주말에 정형외과를 찾아 물리치료를 받는 게 일과다.

손주 양육 할머니, 만족도 높아

대한민국에서 손자·손녀를 키우는 할머니들은 대부분 이씨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몸이 아프고 힘들지만 ‘내가 아니면 누가 내 새끼를 키우느냐’는 생각에 참고 견딘다. 금전 관계로 맺어지는 육아도우미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운 태도다. 혈연에 대한 강한 애착, 제삼자에게 아이를 맡기는 데 대한 거부감, 믿고 맡길 보육기관이 부족한 현실 등이 얽혀 빚어낸 ‘한국적 상황’이다.

보육학자들은 이런 한국 할머니들의 심리와 만족도 등을 연구했다. 결과는 통념과 달랐다. 손자·손녀를 돌본 경험이 있는 할머니가 그렇지 않은 할머니보다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

연세대 아동가족학과 전혜정 교수와 석사과정 오소이씨가 지난해 발표한 논문을 보면 10세 이하 손자·손녀의 양육을 도운 경험이 있는 중·노년 여성의 삶의 만족도는 100점 만점에 61.07점이었다. 반면 그렇지 않은 경우는 57.59점으로 이보다 낮았다.

흥미로운 건 할머니의 만족도와 ‘돈’의 상관관계다. 취재진이 만난 애 키우는 할머니들은 ‘돈 때문에 손주 키우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성모(60)씨는 “돈이 문제가 아니라 아이가 예쁘고 사랑스러우니까, 내 자식들 힘드니까 봐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녀에게 양육비로 월 40만원을 받는다. 염모(65)씨는 “부모 자식 간에 돈이 오가는 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그냥 주는 게 아니라 대가로 주는 거 아니냐”고 했다.



할머니들의 진짜 마음은 뭘까

학계의 연구 결과는 할머니들의 ‘진짜 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이현수씨의 2007년 서울여대 석사논문에서 한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다른 사람은 한 달에 80(만원) 100(만원)을 주더라도 그게 직업이니까 줘야 한다는 거예요. 근데 부모는 가족이니까 무료봉사야. 나라고 돈 쓸 데가 없나. 섭섭해서 말 안 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런 섭섭한 티는 안 내요.” 상당수 할머니들이 손주 양육을 대가가 필요한 ‘일’로 생각하지만 부모·자식 관계의 특성상 드러내고 표현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윤주 성신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의 2012년 논문도 비슷한 결론을 담고 있다. 손자·손녀를 돌본 지 3개월 이상 된 60세 이상 할머니 103명을 인터뷰해 보니 경제적으로 여유로울수록, 가족의 금전적 지원이 많을수록 손자·손녀 돌보는 노인의 활동 만족도가 높았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건 ‘손주병’이다. 아이를 돌보는 할머니 대부분이 육체의 아픔을 호소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05∼2009년 여성의 무릎관절 수술 건수는 2만2910건에서 4만7871건으로 2.09배 증가했다. 수술을 받은 여성의 91.9%가 50대 이상이다. 통계만으로 정확히 파악하긴 어렵지만 전문가들은 육아와 살림을 함께하면서 관절에 무리가 생긴 경우가 상당수일 것으로 추정한다. 2012년 기준 척추관협착증 환자도 50대 이상 여성이 전체의 60%를 차지하고 있었다. 진미정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는 “매일 12시간 육아는 엄청난 시간”이라며 “노동의 관점에서 적절한 보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권기석 문수정 박세환 기자

key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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