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교육 선구자, 아펜젤러] (10) 아펜젤러의 연합정신

입력 2015-01-20 00:34
1898년 촬영한 초기 정동교회의 예배당 내부로, 정동교회는 베델예배당이 모태였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공
젊은 부인과 어린 남매가 시장에서 사온 물건을 나르는 모습으로, 조선 말기 과부의 외출 복장을 짐작할 수 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공
기도하는 한국교회

1888년 1월의 추운 겨울. 한국인들의 신앙 열정은 식지 않았다. 서울 정동의 베델예배당에는 배재학당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학생들의 남편에 이어 아내들도 함께 세례 신청을 하면서 예배당에 모여드는 사람은 많아졌다. 어떤 날은 학생들의 부인 다섯 명이 세례 신청을 했다. 아펜젤러는 주께서 한국인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한국인들은 또 자발적으로 기도하는 기간을 제안했다. 한국인의 뜨거운 신앙과 열정으로 베델예배당에 출석하는 교인 수는 평균 14명이 넘었다. 스크랜턴 대부인(윌리엄 스크랜턴의 어머니)은 여성을 위한 저녁예배를 시작했는데 첫날에 21명이 참석해 선교사들의 사역에 하나님의 영광과 번창함이 깃들게 됐다.

이런 분위기를 몰아 아펜젤러는 장로교와 감리교 등 교단과 상관없이 연합으로 기도 모임을 주도하였고 ‘신실한 말’이라는 주제로 설교했다. 예배에 참여해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은 정부가 금교(禁敎)를 했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연합 정신과 선교지 분할

선교가 정착되고 발전되는 시기에 아펜젤러는 언더우드와 함께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한국 지역에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 지역 분할을 논의하였다. ‘한국의 장로교와 감리교’라는 아펜젤러의 연설문을 보면 그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연합시킨다”고 주장했다. 즉 선교에 있어 교리와 같은 작은 문제로 장로교와 감리교가 서로 싸우지 말고 효율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차원에서 선교지를 분할하자고 한 것이다.

아펜젤러의 연설문을 보면 알 수 있듯 선교지 분할은 갈등의 결과로 나왔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연합의 목적을 가지고 분할이 되었다. 선교사들이 같은 지역에서 복음 사역의 불필요한 중복을 피하고 빠르고 신속하게 전파하기 위해 ‘공통된 이해와 기초를 가지고 서로 나란히 상호 협조를 통해 격려해주는 것’이 선교지 분할의 근본적인 목표였다. 아울러 공동 선교 지역에서는 함께 해야 선교 사역의 힘을 받을 수 있는 의료 사업, 교육 사업, 인쇄 사업 등을 추진함으로써 선교 사역의 효율을 높이고자 했다.

선교지 분할의 초기 논의의 윤곽을 살펴보면 공동 선교 지역과 분할 선교 지역을 나누었다. 공동 선교 지역은 항구도시를 포함한 경기도였다. 한 선교회는 함경도 강원도북부 충청도 전라도를 맡고 다른 선교회는 황해도 평안도 강원도남부 경상도를 맡기로 윤곽을 세우고 몇 개월 뒤에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아펜젤러의 연합운동은 교리에 의해 서로 경쟁하고 싸우는 미국 본토의 북장로교, 북감리교에 연합이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적도 아니고 경쟁자도 아니며 공통된 목적을 위해 함께 일하는 우리’라는 개념은 아펜젤러의 연합정신이 구현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후 선교지 분할이 본격적으로 논의될 때 그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결혼

1888년 3월 14일 아펜젤러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을 집례했다. 일제시대 잡지인 ‘별건곤(別乾坤, 1928. 2)’에서는 최초의 서양식 결혼은 1890년이라고 언급하지만 아펜젤러의 일기에는 이보다 2년 거슬러 올라간다. 일기에 따르면 결혼 당사자는 한용경으로 아펜젤러에게 두 번째로 세례 받은 인물이다. 한용경의 상대 배우자는 과부 박씨(박시실)였다. 당시 윌리엄 스크랜턴의 시병원(施病院)에서 일하던 한용경은 그의 부인이 불과 4개월 전 세상을 떠나자 기독교인 친구들의 소개로 25세인 과부 박씨와 혼인을 맺기로 하였다. 한용경은 박씨에게 마가복음서와 십계명을 보내 신앙을 소개했고 그녀도 마가복음과 십계명을 좋게 생각했다. 이에 한용경은 결혼 식순을 신부에게 보내 결혼식을 함께 준비하도록 했다.

결혼식의 모습을 살펴보면 감리교 선교부 전원과 장로교 선교부 몇 사람, 친구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한국의 전통 혼례와 다르게 저녁에 시작되었고 신랑신부가 앞으로 걸어나오는 것을 비롯하여 아펜젤러가 주례를 인도하면서 기독교식으로 예식이 거행되었다. 결혼식이 끝난 후에는 케이크와 아이스크림, 차를 먹었다. 이 결혼식은 최초의 교회 결혼식일 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 결혼식의 기원이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의의가 있다.

기독교식 결혼이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은 생각보다 큰 의의를 지닌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선 후기의 역사적 배경과 관습을 알아야 한다. 조선 후기에는 과부에 대한 사회 인식이 부정적이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과부는 수절(守節) 즉 정절을 지켜야 하는 사회적 인식이 팽배해 재가(再嫁)는 사실상 괄시를 받았다.

물론 이는 계층에 따라 달랐다. 양반 집안 과부는 대부분 수절을 선택했다. 그러나 양인 이하의 계층은 과부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지만 상당수가 재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재가를 하더라도 불리한 조건에서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재가한 여성에 대해서는 마을과 이웃에서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

과부 재가에 대한 편견은 1894년 6월에야 비로소 깨진다. 고종이 갑오경장을 통해 과부 재가를 언급하면서 악습은 공식적으로 폐지됐다. 그런데 한국의 개신교는 이보다 6년이나 먼저 과부 재가를 실천했고 신부인 과부 박씨에 대하여 차별이 아닌 남녀를 평등한 위치에 놓고 결혼식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아울러 결혼으로 인한 무리한 가계 지출을 지양하고 결혼의 좋은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당시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소요한 명지대 객원교수·교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