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걸 벽이 없다고요? 프로는 ‘그림 호텔’에 맡긴다

입력 2015-01-19 01:00
서울옥션 직원이 지난 15일 경기도 양주 장흥수장고의 11평짜리 개인별 보관고에서 작품 상태를 살피고 있다. 익명의 고객이 취재에 협조해 공개했다. 아래 왼쪽 사진은 개인별 보관고에 들어가기 전 먼저 통과해야 하는 1차 관문으로 엘보 다이얼이 설치돼 있다. 오른쪽은 여유롭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마련된 VIP룸. 이동희 기자
"그림, 안 사요?" "집에 그림 걸 공간이 없네요."

수도권에서 병원장을 하는 컬렉터 A씨가 짓궂게 물었다. 짐짓 눙쳤더니 예상 못한 펀치가 날아왔다. "에이, 누가 집에 거나요. 수장고에 맡기지. 보고 싶을 때 가 얼마든지 보면 되는데…."

이른바 '그림 호텔'에 점당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하는 그림을 맡긴다는 컬렉터의 세계가 궁금했다. 지난 15일 메이저 미술품 경매회사 서울옥션이 운영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의 미술품 수장고를 찾았다. 금융권의 귀중품 보관 서비스와 유사하다. 보석 보다 비싼, 그러면서 더 까다로운 그림을 맡아주는 곳이다.

◇VIP룸에선 거래도 이뤄져=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에 내리니 육중한 철문이 버틴다. 직원이 커다란 엘보 다이얼을 돌렸다. 복도를 따라 이어진 룸이 나타난다. ‘A203호실’. 개인열쇠와 함께 별도 비밀번호를 눌러야 문이 열리는 방이다. 천장이 3.5m로 유난히 높다. 가변형 선반에 여러 크기 그림들이 포장돼 있다. 36.3㎡(11평) 공간을 채운 그림은 얼추 200여점 된다. 100호(130×160㎝), 200호(193×259㎝) 대형작품도 적지 않다. 시가로 따져 수십억∼수백억원어치의 그림이 있는 누군가의 방에 들어왔다는 상상을 해본다. 겉포장에 붙은 태그에는 번호, 작가명, 작품명, 크기, 구입 연도 등이 적혀 있다. 항온·항습(온도 20도, 습도 50% 내외)은 기본이다. 사람이 아니라 그림에 온습도를 맞춘 탓에 약간 한기가 느껴졌다. 최신식 하론가스 소화시설이 눈에 띈다. 불을 끈 후 약제의 잔재물이 남지 않아 박물관에서 선호하는 소화기다. 최신 설비를 갖춘 창고의 개념이 강하다보니, 소파에 앉아서 느긋하게 감상하고 싶을 때는 그림을 꺼내 ‘VIP룸’으로 간다고 한다. 차를 마시며 지인에게 그림 구경을 시켜주는 컬렉터가 있는가하면, 여기서 그림 거래가 이뤄지기도 한다. 서울옥션 김경순 팀장은 “아침에도 고객 한 분이 다녀갔다”며 ‘원하면 언제든지’를 강조했다.

장흥엔 보다 규모가 큰 49.5㎡(15평), 69.4㎡(21평)의 수장고가 있다. 서울 도심인 인사동(1평)과 평창동(6평)에는 작은 수장고를 운영 중이다. 연간 임대료는 규모별로 연 400만∼2700만원. K옥션은 서울 강남 본사에서 소규모로 운영한다. 개인별 공간을 세주는 게 아니라 작품별로 크기에 따라 개당 보관료를 받는다.

◇누가, 왜 맡길까?=이용은 월 단위로 가능하지만 대개 연간으로 빌린다. 적지 않은 금액이다. ‘출혈’을 감수하는 건 집이나 사무실에 걸 수 있는 규모보다 더 많이 산 탓이다. 장식이 아니라 수집이 목적인 것이다. 개인 고객의 경우 미술관 건립을 염두에 두는 경우도 있다고 서울옥션 최윤석 이사는 전했다. 컬렉터 A씨는 “거실에 걸기엔 너무 큰 100호 이상 대형 그림이나, 작품성은 있지만 보고 있으면 우울해지거나 무시무시한 느낌의 그림은 수장고에 맡기게 된다”고 말했다. 개인이 갖추기 힘든 항온항습이나 보안 시스템도 매력이다. 지하실이나 베란다에 방치했다가 곰팡이가 슬어 어렵게 복원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규모가 큰 장흥 수장고는 개인 고객과 기업 고객이 각각 절반이다. CEO가 미술애호가인 중소기업뿐 아니라 시즌별로 그림을 교체할 필요가 있는 호텔에서도 선호한다. 수장 공간이 부족한 작은 갤러리도 단골 고객이다. 인사동 수장고의 경우 월 단위로 빌릴 수 있는 이점을 살려 지방 출신 화가들이 서울에서 전시할 때 요긴하게 쓰기도 한다. 전시 기획자들도 해외에서 빌렸다가 반환 기간이 남아 고민스러울 때 이곳을 찾는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