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라오스 질레트’로 인생의 새 이닝 시작 이만수 전 감독

입력 2015-01-17 02:40 수정 2015-01-17 15:04
이만수 전 프로야구 SK 와이번스 감독이 지난 14일 오후 인천 연수구 테크노파크로 송도센트럴파크에 있는 기린 조형물 앞에서 라오스 야구협회 조기 창립을 기원하면서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헐크’ ‘독종’ ‘빅스마일’ ‘시카고 와이삭스 대사’…. 한국 프로야구의 살아 있는 전설, 이만수(57) 전 프로야구 SK 와이번스 감독의 별명이다. 남들은 그가 탄탄대로를 달려온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의 45년 야구인생 뒤안길을 파헤쳐 보면 피눈물 범벅이다. 야구 국가대표에서 탈락하는가 하면 프로야구 16년 만에 방출까지 당하는 수모도 겪었다. 하지만 그는 오뚝이처럼 다시 살아났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동양인 첫 코치로 팀 우승을 견인한 뒤 금의환향해 감독으로 승부사적인 면모를 보였다. 지난해 시즌이 끝난 뒤 지휘봉을 내려놓고 재능 기부 활동을 하고 있는 이 전 감독은 라오스에 야구 씨앗을 뿌리는 행복나눔 전도사로 ‘제2의 야구인생’ 길을 걷고 있다.

그는 지난해 11월 12일 라오스로 떠나 18박19일간 일정을 마치고 지난달 30일 귀국, 재능 기부활동 중이다. 14일 오후 인천 연수구 테크노파크로 송도센트럴파크에서 ‘라오스의 필립 질레트(1904년 한국에 야구를 전한 선교사)’를 꿈꾸고 있는 이 전 감독을 만났다.

‘은퇴하고 무슨 일?’ 걱정했는데… 22가지도 넘어

이 전 감독은 그라운드에 있을 때보다 더 바쁘게 산다. 지난 4일부터 일주일 동안 경북 문경시에 있는 글로벌선진학교(GVCS)에서 새카맣게 어린 후배들을 지도했다. 지난 8일에는 서울 명동 우리은행 명동금융센터 앞에서 하이패밀리 주최로 열린 ‘행가래(행복한 가정의 내일로) 거리 캠페인’에 참여해 시민들을 헹가래치는 캠페인에도 참여했다.

사실 이 전 감독은 유니폼을 벗고 나서 무엇을 하고 살까 막막했다고 했다. 그때 40년 동안 써온 야구 일기를 떠올리고 펼쳐보니 야구와 관련된 일이 22가지나 되더란다. 그 1순위가 재능기부다. 현역 시절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겠다는 의미로 자신의 재능을 사회 곳곳에서 나눠주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해 봄, 현지에 있는 한 지인의 소개로 1000만원 상당의 야구용품을 보내면서 라오스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현지에 ‘라오 브라더스’라는 팀을 만들어 구단주(?)가 됐다. 아직은 오합지졸, 손가락이 잘린 청년 등 최근엔 선수가 60명으로 늘었다. 이 전 감독의 올해 목표는 라오스에 야구장을 짓고 ‘이만수 열린재단’을 설립하는 것이다.

벌써 가속도가 붙었다. 라오스 국가올림픽위원장과 전 체육장관 등을 만났고, 또 야구협회 설립도 많이 진척됐다. “사회주의 국가여서인지 선수들이 잘 웃지 않았는데 며칠이 지나자 하이파이브를 하고 서로 등을 두드려주는 등 선수들의 표정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현재 라오스에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 관계자들을 비롯해 6명의 스태프가 현재 선수들의 훈련을 돕고 있습니다.”

이 전 감독에 따르면 라오스는 20세기 초 질레트 선교사가 YMCA를 통해 우리나라에 야구를 전해준 상황과 흡사하다. “우선 1세대에게는 야구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세대에서 3세대로 넘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아시아 및 세계 대회에도 참가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는 오는 3월 비엔티안에 완공되는 야구센터 개관에 맞춰 다시 한 번 라오스를 방문할 계획이다. 국내 프로야구 현장도 소홀히 하지 않을 계획이다. 올 시즌에는 MBC 스포츠플러스 객원해설위원으로 마이크를 잡는다.

10년을 매일 4시간 자면서 비전(Vision)을 품다

14세 까까머리 소년에게 야구방망이는 꿈과 희망이었다. 어린 나이에 하루에 4시간밖에 자지 못하고 운동한다는 것은 지금도 상상할 수가 없다. 그렇게 시작된 하루 4시간만 자는 생활은 대학 졸업 때까지 계속됐으며 지금도 주요 고비마다 습관처럼 되살아나고 있다.

이 같은 억척은 아버지와 한 약속 때문이었다. 게임에서 못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안타를 한 개도 치지 못하고 집에 들어가는 날에는 집안이 발칵 뒤집혔단다. 방망이와 글러브는 아버지의 도끼 세례를 피할 수 없었다. 운동을 늦게 시작한 터라 중학교 과정을 1년 더 다녔지만 대구상고에 올라가서는 전국에서 최고의 자리에 설 수 있었고 대학시절엔 꿈에도 그리던 최연소 태극마크를 달기도 했다.

어린시절 호랑이 같은 군인 출신 아버지 밑에서 신앙생활이란 있을 수 없었던 그가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 것은 대학 1학년 때 만난 첫사랑인 지금의 부인 이신화씨의 기도 덕분이다.

홈런왕 삼관왕 MVP도… '아 옛날이여∼'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82년 마침내 국내에도 프로야구가 탄생하게 됐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중학교 때 1년 유급이 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한국 프로야구 원년 1호 안타, 1호 홈런, 1호 타점을 기록하며 젊은 나이에 최고의 스타덤에 오르게 됐다. 최고의 자리에서 모든 이들의 사랑과 부러움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게 잘나가던 이 전 감독에게도 나락의 순간이 찾아왔다. 한순간에 주전선수에서 후보선수로 벤치만 지키던 신세가 됐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벤치에 앉아서 눈치를 보며 음료수를 축내는 일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팀에서 그것도 16년간 선수생활을 했던 이 전 감독에게 구단에서는 방출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말이 방출이지 사실상 ‘해고’나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이제 이만수의 시대는 끝났다’고 했다.

여행용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미국으로

98년 아무 준비도 없이 도망가다시피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갔다. 달랑 여행용 가방 하나였다. 영어도 한마디 못하고 낯설고 문화도 다른 이곳에서 그가 살아 갈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땀방울을 흘리는 길밖에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야구밖에 없었다. 학창시절 몸엔 밴 ‘10년 고생’ 습관을 다시 불러냈다.

인천 송도=글·사진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