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기구한 출생성분에 고통… ‘반쪽 탈북자’를 아시나요

입력 2015-01-16 01:20
중국을 거쳐 한국에 온 지 11년 된 탈북자 미숙(가명·43·여)씨는 ‘경계인’과 같이 산다. 미숙씨와 같은 말투를 가졌지만 북한에 가본 적은 없다. 중국에서 태어나 오래 살았는데 중국인은 또 아니다. 그렇다고 지금 살고 있는 한국 땅에 온전히 동화되지도 못한 그녀의 동거인은 아들 정우(가명·17)다.

미숙씨는 임신 중이던 1998년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서 정우를 낳았다. 중국에선 국적도 없는 불법 체류자 신세였다. 사람이 많은 대도시로 숨어들어 식당일을 하며 정우를 키웠다. 힘든 여건이었지만 정우의 교육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웃돈을 들여 조선족 학교에 보냈다.

미숙씨가 한국에 오기까지 무려 7년이 걸렸다. 2005년 마침내 서울에 와서 한국 국적을 얻은 뒤 가장 먼저 한 것은 정우를 데려오는 일이었다. 정부에서 받은 탈북자 정착지원금의 4분의 1을 들여 입국시켰다. 정우도 무국적자 신세를 벗어나 자연스레 한국인이 될 거란 생각에 한없이 기뻤다고 한다.

정우의 한국 생활은 쉽지 않았다. 조선족 같은 억양에 친구들은 ‘짱깨’(중국인을 비하하는 속어)라고 놀렸다. 미숙씨는 마음이 아팠지만 그래도 말썽 피우지 않고 건강히 잘 자라준 아들이 고마웠다.

그런 아들이 얼마 전 고교 진학 때 일반고 대신 공고를 선택했다. 엄마는 아들이 말하지 않아도 이유를 안다. 미숙씨는 15일 “형편상 대학에 못 갈 수도 있으니 엄마 부담을 덜어주려는 것”이라고 했다. 꿈꾸던 대학 생활 대신 취업을 택한 것이다.

정부는 탈북자 자녀에게 대학 교육까지 지원해준다. 그러나 정우처럼 중국 등 제3국에서 출생한 이들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정우는 한국 국적을 얻은 대신 우리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 지원되는 혜택을 잃은 ‘반쪽 탈북자’다.

2013년 말 한국에 온 지은(가명·17)이도 중국에서 태어난 탈북 청소년이다. 탈북자인 엄마와 조선족 아빠 사이에서 태어났다. 엄마가 탈북 직후 중국 공안을 피해 시골에 들어가 살다 지은이를 낳았다. 엄마는 지인의 밭을 일구며 돈을 벌어 2011년 한국에 온 뒤 지은이를 데려왔다.

지은이는 최근 일반고에 진학하려다 진로를 대안학교로 바꿨다. 또래의 한국 친구들과 경쟁할 자신이 없어서다. 파티셰가 되고 싶어 한다. 대학도 가고 유학도 가고 싶지만 현실의 벽이 높다는 걸 이미 절감했다.

최근 탈북자 입국 규모는 감소하고 있지만 학령기에 진입하는 ‘반쪽 탈북자’는 증가세다. 초·중·고교에 다니는 탈북 청소년은 2009년 1000명을 넘어선 뒤 꾸준히 증가해 5년 만인 지난해 4월 2460명을 돌파했다.

이런 탈북 청소년은 대부분 중국에서 태어났다.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오기까지 수년간 중국에 머무는 경우가 많아서다. 이들은 부모가 먼저 한국에 가서 자신들을 불러줄 때까지 중국 공안이 많지 않은 시골에 숨어 유령처럼 산다.

교육부에 따르면 이런 중국 출생 탈북학생은 지난해 기준 전체 탈북 청소년의 44.9%나 된다.

이들이 북한에서 태어나 부모와 함께 탈북한 아이들과 같은 혜택을 받는 건 고등학교 졸업까지다. 반쪽 탈북자는 특례전형을 통한 정원 외 대학 입학 혜택이 없다. 4년간 지원되는 학비도 받지 못한다. 미숙씨는 “북한에서 태어난 아이나 중국에서 태어난 아이나 다 탈북자 자녀인데 한국에 오면 신분 차이가 생긴다. 그 ‘출생성분’이 아주 큰 작용을 한다”고 말했다.

이렇다보니 학업 중단률도 높다. 지난해 탈북 청소년의 학업 중단률은 일반 학생의 3배 가까이 높았다. 특히 고등학생 탈북 청소년의 학업 중단률은 일반 학생의 5배에 육박한다.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법률은 국회에 1년 이상 계류돼 있다. 새누리당 심윤조 의원이 2013년 말 제3국에서 출생한 탈북자 자녀를 정착 지원 대상에 포함시키도록 ‘북한이탈주민 보호 및 정착 지원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감감무소식이다. 평화재단의 고경빈 이사는 “제3국에서 태어난 아이도 똑같이 부모와 탈북의 고통을 같이했다. 한국에 들어와 겪는 문화적 어려움도 같다”며 “이들에게도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