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읍교회-고흥읍교회] “소아 박만돌군이 열심히 단이다”… 절의로 세운 예배당

입력 2015-01-17 01:04
일러스트= 정형기 jhk00105@hanmail.net
1960년대 초 사경회 후 기념사진
옛 당회록을 살피는 송시종 원장, 정종철·조재열 장로, 최동식 목사(왼쪽부터)
흥양읍성을 설명하는 송시종 고흥문화원장(왼쪽 사진). 최동식 목사와 김옥자 사모.
‘1929년 6월. 김정복 목사가 제5대 교역자로 부임, 제3대 담임목사로 시무하시다. 일제의 잔인스러운 학정과 종교 탄압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직히면서 많은 환난을 당하시며 지나시다가 1942년부터 투옥되니 교회는 문을 닺게 되다.’

‘1945년 8월 15일. 조국 광복과 함께 굳게 다첫든 교회문은 활짝 열리고 투옥되엇든 목사님은 풀여나오시고 흐터젓든 성도들을 다시 모와 광복의 예배를 들이니 기쁨과 감사와 영광의 찬송을 부르며 감격에 남치다. 시온에 영광이 빛나는 아침 매엿든 종들이 돌아오네. 할렐루야! 찬송과 영광과 존귀를 세세에 돌리세. 다시는 이 땅에 민족적 수치와 국가적인 슬픔이 있을손가? 주여! 이 겨레를 직혀 보호하시옵소서.’

‘1946년 6월. 파란 많은 목회생활 눈물과 한숨과 고통과 핍박을 격으신 김정복 목사님께서 군내 소록도 국립나환자교회로 떠나시니 사랑과 덕망과 관후하신 성품에 아쉬운 마음을 금치 못하다. 17년간의 목장을 떠나심은 너무도 아쉬웠으나 불쌍한 나환자의 영혼을 위하여 가시니 말리지 못하였다.’



일경에 구속된 목사, 광복 후 소록도 목회

빛바랜 교회 당회록이다. 한국 교회가 애국심과 신앙심이 결합된 민족교회였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한국 교회는 한말의 국권위기 때 민족교회로 이 땅에 뿌리를 내렸다. 그 무렵 크리스천은 사회의 빛과 소금이었으며, 예수가 그랬듯 불의에 저항했다.

위 기록은 ‘소록도’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 소록도가 속한 전남 고흥군 고흥읍교회 당회록 연혁 부분이다. 연혁은 이 교회 제9대 김선영(1967∼1973년 재임) 목사가 1969년 1월 1일 정리했다.

지난 12일 고흥읍교회(최동식 목사) 당회장실에서 수십년 된 당회록을 최동식(60) 목사, 조재열(77) 원로장로, 정종철(66) 장로, 송시종(67·고흥문화원장) 집사 등과 함께 열람했다. 그들은 연신 ‘할렐루야’ 소리를 내며 기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고흥읍교회는 1905년 4월 시작됐다. 미국 의료 선교사 오원(C C Owen·1867∼1909)의 전도로 하나님을 믿게 된 목치숙, 신우구씨 등 6명이 신씨의 한약방에서 예배를 본 것이 이 지역 모교회의 시작이다.

하지만 조선은 그해 11월 이완용 등에 의해 소위 일본과 을사늑약을 체결함으로써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사실상의 일본 식민지가 되고 만다.

이 패망으로 가는 조선에 예수는 백성의 희망이었다. 1907년 고흥읍교회는 ‘한약방이 좁아 서문 동정지(東町地) 뒷동산에 16평의 예배당을 건축했다’고 적었다. 그 이듬해 ‘교회는 날로 부흥 중이며 많은 소아들이 모이게 되엇으니 멀리 10리박에 호형에서 많이 아이들이 모이였는데 특히 소아 박만돌군이 열심히 단이다’라고 기술했다.

그 한약방은 지금의 옥하리 홍교 근처다. 고흥읍교회는 교인이 늘자 1907년과 1919년 서문과 옥하리 쪽에 헌당을 거듭하다 1954년 옥하리 145-7번지에 지금의 석조예배당 건축을 시작한다. 송시종 원장은 “고흥읍교회는 옛 흥양읍성 안에 터전을 두고 멸망한 조국의 현실에 새로운 희망이 되고자 했다”고 말했다. 흥양은 현 고흥군 일원을 지칭하는 옛 지명이다.



마을 유지들 기독교 배척

고흥은 요즘으로 치자면 해군 군사도시였다. 조선은 왜구의 출몰이 잦자 남양산성, 율치산성 등 많은 성을 쌓았고 사도진, 녹도진, 발포영, 여도영 등 수군 병영을 두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가 되기 전 발포영만호를 지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고흥) 절이도 전투에서 적의 머리 71군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다. 흥양현감 배흥립, 녹도만호 정운 등 이순신 휘하 장수들이 호남과 남해바다를 지킨 것이다.

송 원장은 “그러나 문을 숭상하고 무를 업신여기던 조선은 무장이 많았던 우리 고장 인물을 발탁하지 않음으로써 이곳이 다른 성읍에 비해 서원과 사우 건립이 적었다”고 설명했다. 박치기왕 김일, 세계권투챔피언 유제두 등이 이 고장 출신이란 점은 이와 무관해 보이지 않았다.

현 고흥군청 안에는 동헌 ‘존심당(存心堂)’이 건재하다. 동헌은 일제 강점기 군청사로 사용됐다. 존심은 사람의 욕망 따위에 의해 본심을 해치는 일 없이 항상 그 본연의 상태를 지킨다는 뜻이다. 고흥사람들의 기개와 절의를 보여주는 듯하다.

순교자 이기풍(1865∼1942). 고흥읍교회 당회록은 그가 1925년 6월 부임했다고 밝혔다. ‘재임 기간 고흥 지역에 여러 교회를 세워 활동하시다 5년10개월 만에 총회 전도부 파송에 따라 제주도 선교사로 가시다’라고 했다. 이기풍은 1938년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체포됐고 이때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별세했다. 이기풍의 절개와 양심을 김정복 목사가 이어받은 셈이다.

그리고 고흥읍교회엔 또 한 명의 걸출한 목회자가 부임한다. 한국보수신앙운동을 주도한 정규오(1914∼2006) 목사다. 1953년 부임한 정 목사는 ‘전란 중 많은 계몽운동(공산주의와 기독교)을 하여 지역사회에 공헌했다’라고 서술했다.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보수적 기독교운동을 했다는 뜻이다.

그 재임 시인 1954년 지금의 석조 예배당 기공식이 이뤄졌다. 한데 그 성전 터는 일제 강점기 신사 터였다. 하지만 지역사회는 교회가 신사 터에 예배당을 짓겠다고 하자 핍박했다. 읍내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좋은 위치인 것과 기독교 배척 정서 때문이었다. 우상의 전당인 곳에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대지와 성전을 건축케 되니 군민과 유지들이 결사반대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당시 치안을 맡아 수고하시던 이제국 경찰서장의 노고와 협조가 큰 공이 되어 1957년 완공을 보게 된다.

현재 교회 뒤쪽으로 흥양읍성 잔존 성벽이 남아 이 일대가 어린이공원이 됐다. 당시 일제는 읍성을 허물고 동헌을 접수해 군청을 만들면서 옛 성읍 가장 좋은 위치에 신사를 지었다. 따라서 고흥읍교회는 앞으로 군청, 뒤로 잔존 성벽 사이에 있다. 성돌을 가져다 석조 건축을 했을 개연성도 있다.

한편 정 목사는 1956년 광주중앙교회로 부임했고 1959년 에큐메니컬운동(WCC)에 반대, 장로교 합동교단 설립을 주도했다. 또 1979년엔 합동 교단 개혁을 부르짖으며 개혁 교단 출범의 중심의 된다.



교회 성장과 분열을 보여주는 ‘한국교회사’

이러한 영향으로 고흥읍교회 역시 몸살을 겪는다. ‘60년 2월. 국제적 변동과 신앙사조(WCC)에 의하여 교단이 통합과 합동으로 분열됨으로 본교회는 보수주의인 합동 측에 머물러 진리와 복음 전파의 기치를 들다’ ‘일부 교인이 좌경적인 통합 측과 내통하다가 50여 교우가 분열 이탈하여 중앙교회를 세우니’ 등 한국교회 분열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또 ‘64년 4월 사이비 종파 이단에 현혹되어 용문산 집단에 가는 교인을 책벌키로’ 등의 문구에서 엿볼 수 있듯 이단의 획책에 대응하는 모습도 읽을 수 있다.

고흥읍교회 최대 성장기는 1978∼88년이다. 장년 450여명이 출석, 총 700여명의 교인으로 북적였다. 한때 24만명에 달하던 군 인구 영향도 있었다. 그러던 교회는 고령화와 인구 감소(6만여명)로 교회 부속 유치원 원아모집이 쉽지 않을 정도다. 그리고 랜드마크였던 석조예배당은 고령 교인을 위한 접근성 확보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다. 비단 고흥읍교회 고민이 아닌 한국의 농촌교회가 안고 있는 절박함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주 1∼2명씩 새 교인이 등록하는 것은 기도가 주는 힘이다.

이처럼 고흥읍교회 110년 연혁은 한국교회사나 다름없다. 시대상에 따라 교회 부침이 있을 수 있으나 새벽기도는 끊이지 않았다. 신사라는 우상을 딛고 예배당을 세운 선대의 신앙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교회 직분자들의 2015 비전
“교회와 지역사회 위해 노인복지 계속 펼칠 것”


최동식 목사

“노인 인구가 64%로 전국 시·군·구 중 가장 높다. 교인 70%도 그렇다. 이들을 예수 안에서 행복하게 섬기는 게 내 사명이다. 교회와 지역사회를 위해 노인복지를 계속 펼쳐 나가겠다.”

조재열 원로장로

“사업 한답시고 40대 초반까지 교회에 덕 안 되는 일 많이 했다. 하나님 손에 이끌려 제대로 회개하니 섬길 일이 아주 많았다. 교회가 보금자리처럼 따뜻하다.”

정종철 장로

“개인사업을 하다 암 발병으로 힘들었다. 기도로 극복할 수 있었다. 그간 내 중심의 신앙생활을 했었다. 말씀 중심으로 살고자 한다. 보리가 웃자란 듯한 신앙을 경계하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고흥=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