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라트비아의 밤공기는 몹시 차가웠다. 위도가 높은 북유럽권 지역인데다 겨울 초입이었다. 수도 리가에 들어서자 발트해의 찬 공기는 이제 마음까지 후벼 파고 들어왔다. 낯선 땅에 오면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다. 언어는 둘째 치고 안전을 보장받아 마음 편하게 잠잘 곳 하나 준비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이야 어느 가정을 막론하고 화끈하게 초대를 해주었고, 남미는 소방서나 경찰서 등 관공서에서 대부분 잠을 해결했으며, 아프리카 또한 온 천지가 하나님의 터치로 이루어진 숙소이니 텐트 하나면 걱정할 게 없었다. 말 그대로 감사 그 자체로 다녔다.
그러나 유럽은 달랐다. 곳곳에서 인종 차별적인 요소를 만나야 했고, 사람들 간 온도 차는 현저했다. ‘매일 장례식장 가는 표정들’이라는 한 남자의 자조 섞인 유머처럼 생기 잃은 눈동자엔 건조한 이성만이 너울지는 듯했다. 인사를 건네도 무시하기가 다반사였다. 심지어 교회도 그랬다. 주일이 아니고선 문을 연 예배당은 찾기 힘들었다. 삶의 기저에 개인주의가 팽배해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였다.
밤 12시, 도시에서 텐트 칠 자리를 알아보러 다닌다는 건 무모한 일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황하고 있을 때 나보다 머리는 하나 더 얹은 것 같은 장대 같은 남자가 다가왔다. 나의 사정을 들은 그는 흔쾌히 나를 초대했다. 덩치에 맞지 않게 몹시 온순한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집이 누추해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집은 온통 어질러져 있었다. 몇 달, 아니 한 번도 정리하지 않은 듯 보였다. 그에게는 아주 사랑스러운 딸이 있었다. 아빠가 돌아오자 다섯 살배기 아이는 와락 품에 안기며 애교를 부렸다. 손님에게 새침한 듯 인사를 건네는 게 귀여웠다. 아내는 없었다. 아마 이별한 모양이었다.
아빠와 딸은 애틋해 보였다. 아이는 집안일에 서툰 아빠를 의지했다. 단 둘밖에 살지 않는 가정에서 부녀의 모습이 아프게 들어왔다. 엔지니어 일을 하고 있는 그는 회사 생활과 육아를 병행하느라 지쳐 보였다. 그렇지만 딸에 대한 애정 표현만큼은 숨기지 않았다. 이름이 무척 생소하고 어려웠으므로 그냥 ‘케빈’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나는 케빈이 건네준 간식을 먹으며 이 가정의 평안을 위해 두 손 모아 기도했다.
13세기, 루터교에 대한 지지로 이곳 주민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믿음을 지키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세기 들어 나치와 공산주의의 연이은 핍박이 진행되었다. 이후 경건의 모양만을 띤 교회들의 외식주의에 지쳤고, 진리의 가르침의 부재에 심각한 회의를 느낀 사람들은 냉담자가 되어 예배와 멀어지면서 기독교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91년 독립국가가 된(1918년에도 독립한 적이 있음) 신생국가의 교회는 이제 소수의 신자들과 다수의 관광객들이 찾고 있을 뿐이다.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도움을 준 케빈을 만난 건 감사한 일이었다. 동시에 그가 교회를 나가지는 않지만 크리스천임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믿는 공동체로 세워진 교회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할 때 연약한 이들은 상처받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세대를 거치고 진리 안에서 변화가 없게 되면 교회 건물이 아닌 아예 하나님을 잃을까 걱정되는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케빈은 딸과 산책을 위해 함께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섰다. 영락없는 ‘딸 바보’ 아빠 모습이었다. 그에게는 온기가 있었다. 그를 보면서 나 자신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조심스레 묻고 싶다. 당신에게는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나눌 수 있는 따뜻함이 있느냐고.
문종성 작가(vision-mate@hanmail.net)
[문종성의 가스펠 로드] (39) 라트비아에서 만난 ‘딸 바보’-라트비아 수도 리가에서
입력 2015-01-17 0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