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안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콩나물시루안처럼 빽빽이 서있는 어른들. 소녀 하나가 누군가의 코트 주머니에 슬쩍 손을 넣는다. 소매치기 소녀는 어느 날 컴컴한 거리에서 한 할머니를 만난다. 할머니가 멘 가방이 불룩하다. 가방을 뺏으려는 소녀와 뺏기지 않으려는 할머니. “네가 이걸 심겠다고 약속하면, 놓아주마.” 가방을 뺏고 싶은 욕심에 소녀는 말한다. “알았어요. 약속해요.” 가방을 열자, 속에 든 건 도토리뿐이다. 그제야 소녀는 ‘약속’의 의미를 깨닫는다. 문득 심장에서 일어나는 변화. 난생 처음 풍요로워지는 느낌. 그건 소녀가 더러운 회색의 도시를 녹색으로 바꾸어가는 거대의 변화의 출발이다.
우중충한 색으로 삭막한 도시의 분위기가 이어지던 그림책에는 아연 색이 나타난다. 담담한 수채화에 굵은 선 맛의 크레파스와 따뜻한 느낌의 파스텔이 합쳐지며 활기가 생겨난다. 도토리가 든 가방을 베고 잠들었던 소녀를 무수한 새들이 깨우는 장면. 그 새들이 알록달록 크레파스로 표현된 게 압권이다.
찻길 옆에, 로터리 한가운데, 신호등 옆에, 녹슨 철책으로 둘러싸인 무너진 건물 옆에 도토리가 심어지고, 싹이 나고…. 책장을 넘기는 과정은 소매치기 소녀가 심은 도토리가, 변화를 만들어내기에는 미약해 보이는 그 도토리가 가져온 녹색 도시로의 변신을 확인하는 일이다. 서로에게 무신경했던 도시인들이 소녀를 따라 뭔가를 심으며 함께 푸른 도시를 가꾸어가는 과정이 벅차게 다가온다. 도심 옥상정원에서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가족의 이야기와 새들의 재잘거림이 들리는 듯한 그림이 어울린다.
글 없이 그림만으로도 좋은 책이다. 2014년 볼로냐 라가치상 픽션 부문 우수상.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어린이 책-약속] 소매치기 소녀, 회색 도시를 녹색으로 바꾸다
입력 2015-01-16 0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