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주세요. 저희 아이들이 묶여 있다고 해요. 아이들을 잡아놓고 있대요. (제가) 재혼을 했는데 전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있어요. 고등학생 딸 2명이요. 경찰에 신고하면 아이들을 죽이겠대요.”
김모(43·여)씨가 경찰에 도움을 요청한 13일 오전 김씨의 전 남편 박모(49)씨는 이미 싸늘한 주검으로 자택 욕실에 방치돼 있었다. 김씨와 5년 전 재혼한 김모(46)씨는 전날 박씨를 찾아가 살해했다. 그 집에 있던 박씨의 딸들은 팔다리를 묶어놓고 밤새 감금했다. 박씨 부녀와 함께 사는 40대 여성이 함께 붙잡혀 있었다. 김씨가 이들을 인질 삼아 요구한 건 아내였다.
◇집착=인질범 김씨는 10여년 전부터 동거하던 아내 김씨와 2007년 결혼했다. 아내는 재혼이었다. 그에겐 전 남편 박씨와 결혼해 낳은 아들과 두 딸이 있었다. 아이들은 박씨와 살았고, 엄마와 결혼한 김씨를 ‘삼촌’이라고 불렀다.
김씨 부부는 결혼 7년 만인 지난해 8월 별거에 들어갔다. 잦은 갈등이 원인이었다. 인질범 김씨는 별거 이후 눈에 보이지 않는 아내의 행실을 의심했다.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생각했다. 보험설계사인 아내는 밖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생계를 위한 것이었지만 김씨는 그 모든 게 못마땅했다. 김씨는 직업이 없었다. 아내는 김씨를 피했다.
12일에도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김씨는 이날 오후 3시쯤 경기도 안산 상록구 본오동 다세대주택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아내의 전 남편 박씨 집이었다. 40대 여성이 문을 열었고, 박씨나 아내는 없었다. 김씨는 “박씨 동생인데 볼일이 있어 왔다”고 속여 집에 들어갔다. 집 안엔 동거녀 말고도 박씨의 작은딸(17)이 있었다. 김씨는 그 집에서 박씨가 오길 기다렸다.
◇참극=김씨는 오후 9시쯤 귀가한 박씨와 다투다 몸싸움을 벌였다. 박씨는 거동이 불편한 지체장애인이었다. 오래전 등산 중에 사고를 당했다. 김씨는 주방에 있던 흉기를 가져다 그를 찔렀다. 박씨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김씨는 시신을 욕실로 옮겨놓은 뒤 박씨의 작은딸과 동거녀를 보자기와 끈으로 묶었다. 오후 11시가 넘자 누군가 집으로 들어왔다. 박씨의 큰딸(18)이었다. 김씨는 큰딸도 방에 가뒀다. 그러고 다시 아내에게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연락이 닿은 건 다음날인 13일 오전이었다. 아내는 딸의 전화를 받았다. 김씨는 “딸들을 잡고 있다. 여기로 오라”고 했다. 경찰은 오전 9시36분쯤 신고를 접수했다. 파출소장부터 안산상록경찰서장과 형사과장, 경기지방경찰청 관계자들과 인질협상팀, 소방차와 구급대 등이 속속 현장에 도착했다. 오전 11시30분쯤엔 경찰특공대가 배치됐다. 경찰은 박씨 집으로 들어가는 도시가스를 차단했다.
◇대치=경찰은 자수를 설득하며 협상을 시도했다. 처음에 김씨에게 화를 냈던 아내는 “미안하다”며 인질극을 그만두라고 요구했다. 김씨는 물러서지 않고 경찰과 대치했다. 흥분한 채 욕설과 고성을 퍼붓던 김씨는 오후가 되자 “자수하겠다. 문으로 내려가면 되나? 오전부터 통화한 경찰을 집으로 보내 달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해당 경찰이 집으로 올라가자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1분여간 전화도 받지 않았다. 경찰은 인질이 위험한 상황이라고 판단해 특공대를 투입했다. 특공대 10명은 오후 2시25분쯤 현관문과 창문을 뜯고 진입했다.
진압은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김씨는 순순히 검거됐다. 집 안에서는 숨진 박씨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작은딸이 발견됐다. 흉기에 급소를 찔린 박양은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숨졌다. 큰딸과 박씨의 동거녀는 무사했지만 정신적 충격으로 아무 진술을 하지 못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비극=숨진 박씨는 이혼 후 수년간 혼자 자녀들을 키웠다. 40대 여성은 3년 전부터 함께 살았다고 한다. 아이들은 이 여성을 이웃들에게 ‘이모’라고 소개했지만 사람들이 없을 땐 ‘엄마’라 불렀다고 한 주민은 전했다. 그는 “애들이 다 착했다. 장남은 가족이 좀 어렵게 사니까 살림에 보태려고 학교를 안 가고 직장에 다니는 걸로 안다. 남자가 고생해서 애들 다 키웠는데 이제 와서…”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장남(21)은 인근 공단 내 회사 기숙사에서 살고 있다. 경찰은 조사를 마치는 대로 김씨에 대해 살인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다.
안산=황인호 임지훈 기자, 강창욱 기자 inhovator@kmib.co.kr
부인 외도 의심해 ‘24시간 인질극’… 가장의 광기, 또 두 목숨 앗아갔다
입력 2015-01-14 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