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모(80)씨는 서류상 의류수출업체 2곳의 대표이사였지만 실상은 ‘유령회사’ 사장이었다. 2008년 그는 의류수출업계 경험이 있는 백모(40)씨를 찾아 “내 이름으로 수출 실적을 꾸며 오면 수수료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대출 브로커로 살아오던 백씨는 이 말을 얼른 알아들었다.
백씨는 서울 동대문·남대문을 돌아다니며 ‘궁합’이 맞는 이들을 찾았다. 세금을 피하려는 일부 의류상인들이 자신의 매출을 신씨의 것으로 둔갑시켜줬다. 백씨는 신씨가 7개월간 6억7000만원어치를 수출한 것처럼 신고서·필증을 꾸몄고, 세관 신고까지 마쳤다.
신씨는 서류를 들고 우선 무역보험공사(무보)에 찾아갔다. 자금 조달이 힘든 중소 수출업체를 가장해 대출 보증을 받기 위해서였다. 무보는 형식적으로만 서류를 들춰볼 뿐 통장을 살펴 외국 송금 기록을 점검하지도 않았다.
은행들은 무보 보증만 믿고 선뜻 돈을 빌려줬다. 현장조사 전에는 방문을 예고했다. 신씨는 사무실을 단기 임차해 대출 브로커들을 직원처럼 앉혀 두고 은행을 속였다. 대출금이 들어오면 바로 폐업을 신고했다.
이 수법으로 은행돈을 먹고 튄 유령회사 대표는 신씨 외에도 9명이 더 있었다. 이들이 농협·기업은행 등 4곳에서 빌린 24억3800만원 중 9억3500만원을 무보가 대신 갚았다. 무보가 회수한 돈은 현재까지 1400만원뿐이다.
서울중앙지검 외사부(부장검사 노정환)는 13일 신씨 등 4명을 구속 기소하고 대출 브로커 백씨 등 6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달아난 3명은 지명 수배했다.
검찰 관계자는 “무보는 폐업 통보만 받으면 대위변제했고, 검찰 고발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였다”고 개탄했다. 무보는 6700억원대 피해를 낳은 모뉴엘 사태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검찰은 이번에도 무보 직원이 로비를 받은 단서를 잡고 수사 중이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
허위 수출 실적 서류에 또 놀아난 무역보험公
입력 2015-01-14 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