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1910년대 ‘內地 개념’ 세뇌 시도… “항일 기독인들 저항으로 실패”

입력 2015-01-14 01:34

한국기독교역사학회는 지난 10일 서울 마포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제331회 학술대회를 열고, 일제무단통치시기(1910∼1919년) 고양된 한국 기독교의 항일정신과 한국초기 개신교 신문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논의했다.

‘일제무단통치시기 한국 기독교의 내지(內地) 개념 수용 과정과 일본인식’을 제목으로 발표한 연세대 홍이표 박사는 “내지란 곧 본국(本國)을 의미하는데, 일제의 ‘내지시찰단’은 일본을 문명과 근대에 도달하기 위한 첩경이라고 세뇌시키려 했지만 서구의 근대를 배경으로 한 선교사들과 밀착된 기독교인들을 설득시키기는 어려웠다”고 밝혔다. 이어 “조선총독부는 ‘일본조합교회’를 통해 통제가 어려운 한국기독교를 동화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했다”고 말했다.

홍 박사는 “을사늑약 체결 후 일본의 실체를 파악한 기독교인들은 상동파(상동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했고 이후 신민회 등으로 진화해 나갔다”며 “이동휘 손정도 여운형 등 기독교 독립운동가들은 3·1운동 이후에도 조선을 지칭할 때만 내지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독교의 항일운동이 거세지자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강한 핍박이 있었다”며 “하지만 기독교는 내지 회복의 의지를 꺾지 않았으며 그 결과 한국사 안에 ‘항일적 교회’로 자리매김했다”고 평가했다.

‘한국 초기 개신교 공동체와 교단 신문의 상호관계 연구’를 제목으로 발표한 노민정(템플대 종교학 박사과정)씨는 “1897∼1900년 사이 초기 개신교의 대표적 신문인 ‘죠션크리스도인회보’와 ‘그리스도신문’ 읽기 및 독자투고는 한국 초기 개신교 공동체에서 최초로 등장한 종교적 실천행위”라고 평가했다. 죠션크리스도인회보는 미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1897년 2월, 그리스도신문은 미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1897년 4월 창간한 순한글 주간 신문이다.

노씨는 “순한글로 작성된 신문은 더 많은 독자들이 읽기에 수월했으며 주기적 신문 읽기는 독자들로 하여금 글을 투고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투고한 글의 유형은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의 현황(세례교인 수, 교인들의 자선행위)과 개신교의 교리에 대한 설명, 회심 등 종교체험 및 모범 전도인 소개 등이었다”며 “한 예로 그리스도신문 1898년 6월 9일자에는 ‘부산의 덕원 돌고개에 사는 교인이 개신교를 믿은 후로 축첩을 그만두고, 직접 안식일을 지키며 노동하는 동시에 전도행위를 열심히 하여 모범적인 행동을 보였다’는 투고가 실렸다”고 말했다.

노씨는 “독자들은 신문을 통해 개신교의 교리를 배우고, 이를 실천한 실제적 예를 정기적으로 접하며 신앙심을 키워갔다”고 말했다.

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