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교육 선구자, 아펜젤러] (9) 베델 예배당의 정착

입력 2015-01-13 01:30
초기 정동교회는 남녀 자리를 구분했다. 출입문 가까이에 남자가 앉았고, 여성은 멀리 앉았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공
아펜젤러가 1900년 서울 남대문 상동에서 촬영한 한국 여자 감리교인.
베델 예배당의 처음 열매

베델 예배당이 세워지면서 한국 선교의 시작을 알리는 최초의 열매들이 생겨났다. 1887년 10월 9일 한국 감리교인의 첫 예배가 드려진 이후 감리교 최초로 여성 세례가 거행됐다. 한국 감리교인을 위한 최초의 성찬예배를 드렸으며, 아펜젤러의 첫 한국어 설교가 시작됐다.

한글 성서를 최초로 번역했던 존 로스 선교사는 아펜젤러의 선교 사역에 감탄했다. 그가 아펜젤러의 집에 머무는 동안 아펜젤러의 성품과 사역 원칙, 방식을 보면서 한국 사역이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로스는 아펜젤러의 첫 사역과 열매들이 사회에 모범이 되어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도록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개신교의 첫 여성 세례자와 성찬예식

1887년 10월 16일 주일, 아펜젤러는 권서인 최씨의 아내에게 세례를 줬다. 최씨 아내는 개신교 최초의 여성 세례자이다. 아펜젤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녀는 세례문답에 매우 확실하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나는 우리 감리교가 안방까지 들어갔음에 무척이나 기쁘다. 말씀을 받은 다른 여성들도 있다. 하나님 첫 열매를 축복하소서!”

아펜젤러가 ‘안방’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복음이 한국의 가장 핵심 장소까지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방은 대문, 부엌, 사랑채를 거쳐 들어가는 곳이다. 한국 남자들의 복음 수용에 이어 여성들까지 전해진 것은 한 가정의 온전한 복음화가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복음이 수용되고 정착된 곳에는 성찬예식이 이루어진다.

아펜젤러는 일주일이 지난 10월 23일 한국 교인들의 주일예배를 위해 성찬예식을 거행했다. 베델 예배당이 반석 위에 굳건히 세워진 교회가 되도록 성찬예식을 가졌다. 성찬에는 권서인 최씨를 비롯해 최씨의 아내와 장씨, 강씨, 한씨, 의사 스크랜튼이 참석했다. 최초의 한국인 감리교 예배와 여성 세례, 성찬예식에 이르기까지 아펜젤러의 첫 성찬예식은 생명의 떡을 백성에게 나누어 주는 감격으로 이어졌다.

개신교 최초의 예배와 수요기도회

아펜젤러는 남녀 구분 없이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하는 선교를 지향했다. 하지만 한국의 문화는 남녀를 엄격히 구분하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복음전도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예배를 드리는 모습에도 이러한 풍습은 여실히 드러났다. 현대 교회와는 다르게 한 장소를 사용하면서 남녀 자리를 구분해야 되는 모습은 베델 예배당도 예외가 아니었다.

최씨 아내가 세례를 받은 후 한국 감리교회에 복음을 듣고자 하는 여성들이 점차 몰려들었다. 1887년 11월, 가옥을 매입하여 베델 예배당을 확장했다. 사방 8자가 되는 정사각형의 좁은 예배당이 8×16자가 되는 직사각형의 예배당이 되었다. 그리고 설교 강대상을 중심으로 남녀는 가운데 휘장이나 병풍을 사이에 두고 자리를 잡았다.

보통 교회의 남녀 배치는 강대상에서 회중석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남동녀서(男東女西), 남좌여우(男左女右)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상식이다. 회중이 많이 있는 예배당 같은 경우에는 철저히 남녀가 구분되고 여자들의 모습이 보이면 안 되기 때문에 출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지고 깊숙이 위치한 장소가 여자들의 위치가 된다.

실제로 남녀가 구분되었던 예배당의 도면, 사진을 살펴보면 남녀의 위치는 거의가 출입구의 동선의 길이에 따라 구분된다. 예배의 모습은 여성들이 교회로 몰려오면서 자연스럽게 남녀의 자리가 구분이 되었을 것이며 아펜젤러는 정 중앙에 있어야 되는 강대상을 남자의 위치로 이동하여 남녀를 철저히 구분하였을 것이다.

1887년 12월 4일 주일,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학생 유치겸, 윤돈규에게 세례를 주었다. 학생을 중심으로 세례를 받은 이들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복음에 목말라 있었다. 아펜젤러는 학생을 중심으로 수요일 저녁 기도회를 시작했다. 이것은 개신교 최초의 수요예배가 됐는데 처음엔 배재학당 학생들과 세례 받은 학생들이 모여 시작했다.

호기심에서 주일 예배에 출석하는 이들이 모인 회중예배와 달리 수요기도회에 모이는 이들은 더욱 진지했다. 이들은 모일수록 신앙을 갈구했다. 아펜젤러는 신앙에 목말라 하는 이들에게 하나라도 더 많이 주의 진리를 가르치기 원했다. 그는 일상에서 의사소통 문제를 잘 언급하지 않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임할 때마다 한국어에 유창해지고 싶었다. 그의 일기엔 언어를 위해 기도했다는 대목이 많다.

성탄예배와 한국어 설교

아펜젤러는 권서인 최씨의 도움으로 한국어 설교를 시작했다. 그해 12월 25일 성탄절이었다. 아펜젤러가 영어로 말하면 최씨가 한국말로 표현했다. 어떤 대목에서는 서툴러도 한국어로 직접 말했다. 그는 “나는 설교를 읽을 수밖에 없었지만 어느 정도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말할 수 있었다”고 일기에 기록했다. 성탄 설교 본문은 마태복음 1장 21절이었다. 예배는 세례와 찬송, 스크랜튼의 기도, 말씀 봉독(마태복음 2장, 누가복음 2장), 설교, 주기도문, 찬송(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축도로 진행됐다. 사회는 길모어 선교사가 맡았다.

성탄예배는 성황리에 마쳤다. 아펜젤러는 한국어 설교를 했던 자신은 초라했지만, 주의 이름으로 설교했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지 않도록 기도했다. 아펜젤러는 한국 선교 2년 반이 되면서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그가 추구한 선교는 한국인처럼 되는 것이었다.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한국어로 설교할 수 있는 때는 행복한 날이 될 것”이라고 고백한 것처럼 그는 한국인의 진정한 친구가 되고 싶었다.

소요한 명지대 객원교수·교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