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유람단 일원이었던 구한말 개화파 정치인 서광범은 1881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곳저곳에서 선진 문물을 시찰하다 요코하마의 한 양복점에 들어간다. ‘개화복’으로 불렸던 양복을 신기하게 바라본 그는 양복을 즉석에서 구입한 뒤 이를 입고 귀국한다. 당시에는 파격적인 일대 사건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양복 입은 사람’은 그렇게 탄생했다. 서광범과 함께 갑신정변(1884년)을 일으킨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도 두루마기를 벗고 잇따라 양복을 걸치게 된다. 이들이 구입한 옷은 라펠이 작고 앞단추가 3∼4개 달린 풍성한 실루엣의 ‘색코트(sack coat)’였다.
1895년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양복 착용이 공인되기에 이른다. 이듬해에는 광화문 우체국 앞에 우리나라 최초의 양복점이 들어서게 되는데, 일본인 하마다가 세운 ‘하마다 양복점’이 바로 그것이다. 박영효가 정장을 한 벌 맞추려 하자 김옥균이 이 양복점을 소개해줬다는 일화도 있다. 이후 일본인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조선인 양복재단사들이 양성됐고, 마침내 1903년 조선인이 설립한 최초의 양복점(한흥양복점)이 등장한다.
현재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양복점은 서울 중구 저동의 ‘종로양복점’이다. 창업주 이두용씨가 1916년 종로1가 보신각 근처에서 문을 연 뒤 그의 4남 해주씨(이상 작고)에 이어 지금은 손자인 경주씨가 3대째 운영하고 있다. 한국 맞춤양복의 역사와 함께한 지 무려 100년이다. 지금은 기성복에 밀려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 양복점이라는 긍지는 대단하다. 2011년부터 ‘근·현대 직업인 생애사’를 추적하고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이 8일 ‘100년의 테일러 종로양복점’이라는 제목으로 이 양복점의 조사보고서를 완성했다.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돌아가지만 100년의 세월을 재단해온 장인들과 함께 아날로그 시대를 음미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하지 않았던가.
김준동 논설위원 jdkim@kmib.co.kr
[한마당-김준동] 양복
입력 2015-01-10 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