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에서 신촌으로 넘어가는 사직터널 위편 언덕에는 고색창연한 붉은 벽돌집이 하나 있다. 93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집은 ‘딜쿠샤(Dilkusha)’란 이름을 갖고 있다. 힌디어로 ‘이상향, 행복한 마음, 기쁨’을 뜻한다. 무역상이자 UPI통신 서울특파원이었던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가 일제 강점기인 1923년 이 집을 지으며 벽에 ‘DILKUSHA(딜쿠샤). PSALM CXXVII-I(시편 127편 1절)’라는 문구를 새겼다. 종로구 행촌동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가면 나오는 이 집을 주민들은 ‘은행나무 집’이라 부른다. 바로 옆에 420년 된 높이 30m 은행나무가 우뚝 서 있다.
정부는 이 집을 문화재로 지정하려다 실패했다. 저소득층 몇 가구가 이 집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수년 전 ‘정당한 값’을 치르고 방을 얻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부는 매년 ‘무단 점유’에 대한 변상금 고지서를 보내고 있다. 100년 가까이 굴곡 많은 우리 근현대사를 지켜본 딜쿠샤는 왜 이런 기구한 신세에 놓이게 됐을까.
지난 7일 찾아간 딜쿠샤는 오랜 세월을 버텨온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바래고 부서진 외벽 주변에는 LPG 가스통과 화분, 신발 등이 놓여 있다. 건물 뒤편은 지하로 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패널로 덮인 상태였다. 지하 1층의 한 쪽방 문에는 ‘사람 살고 있습니다’라고 적힌 쪽지가, 1층 입구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니 외부인이 들어가면 안 됩니다’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사는 게 이래 가지고 사람을 못 들어오게 하는데….” 30년 넘게 이 집에서 살고 있다는 김모(69) 할아버지가 인기척을 느끼고 밖으로 나왔다. 그의 안내에 따라 들어가자 오래된 나무 바닥이 울어댔다. 아내(67)와 함께 사는 김 할아버지의 단칸방 벽에는 이제 고등학생이 된 손녀의 아기 때 사진이 걸려 있었다. TV와 책상, 누군가 쓰던 것을 주워온 듯한 아이용 2층 침대가 살림살이의 전부였다.
딜쿠샤에는 저소득층 9가구가 쪽방처럼 공간을 쪼개 살고 있다. 한때 17가구가 살았는데 지난해 14가구로 줄었고 올해도 5가구가 떠났다. 2006년부터 3, 4년 단위로 ‘무단 점유’를 알리는 고지서와 함께 날아오는 변상금 통지서가 무서워서다. 김 할아버지에게 부과된 15년치 변상금은 2670여만원이다. 연체 이자만 800만원에 이른다.
딜쿠샤 소유권은 정부에 있다. ‘집주인’ 앨버트 테일러가 한국을 떠난 뒤 미 군정청을 거쳐 정부로 넘어왔다. 그 사이 집 없는 이들이 하나둘 이곳에 모여들었다. 자기들끼리 방을 두고 거래를 했다. 나름의 값을 치르는 ‘분양’이 이뤄진 것이다. 김 할아버지도 “30여년 전에 살던 사람에게 800만원을 주고 이 방을 샀다”고 했다. 현재 딜쿠샤는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에서 위탁관리하고 있다. 캠코 측은 8일 “국가 재산을 무단 점유하고 있어 변상금을 부과하는 것”이라며 “다른 변상금 부과 사례에도 알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사거나 사인(私人) 간 거래한 경우가 있기 때문에 딜쿠샤만 특별한 것은 아니다”고 했다.
한동안 잊혀져 있던 딜쿠샤는 2006년 앨버트 테일러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한국을 찾으면서 재조명됐다. 주말마다 관광객이 100여명씩 찾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자 문화재청은 2013년 문화재 등록 심의를 했다. 하지만 ‘거주민 무단 점유’ 등의 사유 때문에 문화재 등록을 하지 않기로 가닥을 잡았다. 서울시 역시 같은 이유로 시(市) 등록 문화재 지정을 보류했다.
문화재급 유적 관리와 저소득층 주거권 보장을 놓고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는 쉽게 풀리지 않고 있다. 한때 딜쿠샤에 사는 이들에게 임대주택을 주자는 얘기도 나왔지만 쑥 들어갔다. 다른 사람과 형평성이 맞지 않아서다. 서울시 관계자는 “최근 민간단체를 통해 다른 해결책을 모색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딜쿠샤를 지은 앨버트 테일러는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입수해 뉴스로 타전하며 세계에 우리의 독립 의지를 알렸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감시 대상이 됐고, 1941년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가택 연금됐다가 이듬해 5월 추방당했다. 1948년 미국에서 사망했지만 유언에 따라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묻혀 있다. 그가 이 집 벽에 남긴 시편 127편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시면 세우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며….’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기획] 문화재급 벽돌집이 쪽방촌으로… 기구한 ‘딜쿠샤’
입력 2015-01-09 0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