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도 페인터 나난 “통일은 하나님의 명령 분단 울타리 걷어야죠”

입력 2015-01-10 02:38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기 위해 생가지를 꺾는 것이 안타까워 재활용 재료를 이용해 ‘크리스마스 트리 키트’를 만들어 보급하는 작가 나난. 자신이 출석하는 서울 이태원동 대성교회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대성교회 뒤로 해방촌이 보인다. 강민석 선임기자
“통일에 관심 없는 사람은 하염없어요.”

형용사 ‘하염없다’. ‘시름에 싸여 멍하니 이렇다 할 만한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윈도 페인터 나난(36·서울 이태원동 대성교회)에게 DMZ 생태 일러스트레이션 작품을 그린 이유를 묻자 이런 대답이 나왔다.

나난은 지난해 관계 당국의 협조를 받아 파주, 철원 등서 동식물을 관찰해 왔다. 사향노루, 산양, 삵, 붉은머리오목눈이, 콩새, 쑥새, 저어새 등은 관찰하고 공부할수록 우리 땅에서 서식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통일부 등은 그녀의 작업을 위해 생태자료 등을 제공했다. “철원에선 조류 관찰이 쉬웠으나 동물 관찰은 가로막힌 철조망으로 쉽게 관찰되지 않아 분단이 실감났다”고 밝혔다.

1979년생 나난(본명 강민정)에게도 통일은 하염없는 일일 수 있다. 나난은 자신이 ‘어떤 시름’에 싸여 있는 줄은 모르겠으나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은 분명했다고 말한다. 그가 태어난 79년은 멸공의 이데올로기가 횡행했으며 그런 가운데도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해 1월 신년사에서 북한에 당국자 간 대화를 촉구했다. 멸공과 대화는 불립이었으나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이상했다. 결국 유신헌법으로 정권을 연장하던 박 전 대통령은 그해 10·26사건으로 서거했다.

그 79년. 나난은 모태신앙이었다. 서울 노량진2동 장성교회를 외할머니, 어머니 손에 이끌려 다녔다. 그리고 중학교 때까지 주일학교와 중등부 크리스천 학생으로 교회 생활에 충실했다.

한편 그의 사춘기와 청소년기는 80년대 쟁취한 민주화 성과에 힘입어 대한민국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아버지 세대의 가난은 그의 삶과 무관한 것이었다. 남북한 경제적 격차가 벌어지면서 교련훈련 같은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교육도 느슨해졌다. 반공과 멸공은 사어(死語)가 되어갔다.

지난해 히트한 드라마 ‘응답하라 1994’ ‘응답하라 1997’. 그 내용과 비슷한 환경이 나난에게 주어졌다. 서태지와 프로야구는 문화코드였다. 반면 통일은 ‘하염없었다’.

이런 90년대 풍요는 나난을 밖으로 돌게 했다. 자연스럽게 교회를 멀리했다. 나난은 이태원과 홍대 클럽의 ‘빠순이’였다.

“통일?… 우리 얘기였다”

“10, 20대들에게 ‘통’자만이라도 관심을 갖게 하고 싶어 DMZ 내의 포유류, 조류, 식물류를 그리게 됐어요. 그 일러스트 작품으로 통일문화운동을 벌이기도 하고 티셔츠 등 문화상품을 만들기도 했어요. 하지만 저 역시 그 나이 때 통일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한데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의 정의와 지혜에 의지해 작업하다보니 하나님은 생명이시고 늘 생명을 살리시는 일을 하셨어요. 신약에선 평화를 가장 많이 얘기하셨죠. 생명 치유와 나눔이 하나님 뜻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우리의 현실을 깨치게 됐죠. 통일은 하나님의 명령 같은 거라고 봐요. 평화의 예수니까요.”

나난은 지금 생명과 평화를 주제로 한 콜라보레이션 아티스트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지난 6∼7일 그녀가 출석하는 대성교회에서 만났을 때도 광고 세팅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 ‘빠순이’는 바로 이 대성교회에서 엎어졌다. 10여년 전 일이다.

“대학 가겠다고 건성건성 교회에 다니다가 노는 거에 빠져 클럽녀가 됐어요. 어느 정도였냐면 홍대앞 라이브 클럽 합법화를 위해 운동을 했을 정도니까요. 클럽 합법화를 쟁취한 후 당시 고건 서울시장과 테이프 커팅을 했어요. 대표였죠. 술과 담배를 물고 살았고요. 늘 ‘의리’를 강조하며 그 의리를 신처럼 믿었죠.”

젊음과 방황을 상징하는 거리 이태원과 홍대 앞은 더없는 놀이터였다. 서울예전 광고창작과 졸업 후에도 그 생활은 계속됐다. 그러던 무렵 아버지가 아팠다. 암이었다. 딸은 여전히 건성건성이었다. 아버지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어라”고 병상에서 권면했다. 친구들조차 교회 나가자고 졸랐다. 듣지 않았다.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리고 프리랜서 작가 겉멋으로 이태원을 주 터전으로 살아가던 그는 시름시름 몸이 아팠다. 이명에 시달렸고 눈이 침침했다. 그럼에도 광고와 잡지일 한답시고 흡연과 음주를 달고 살았다.

명성은 그를 고집스럽게 만들었다. 그녀가 손대는 잡지건 광고건 대박을 쳤다. LG텔레콤의 카이매거진 편집장을 하면서 ‘나난스 다이어리’라는 젊은 감각의 일러스트 그림을 연재했는데 그것이 명성을 가져다주는 계기였다. 나난을 비롯한 클럽녀들은 그렇게 “나는 나다”를 외쳤다. 그녀는 친구들과 달리 강하지 않고 무난해 ‘무난한 나난’이 됐다. 그 ‘무’를 뺀 ‘나는 나’가 작가명 ‘나난’이 된 이유다.

그녀는 하루아침에 스타가 됐다. 평소대로 신나게 하루를 논 나난은 홍대 앞 친구 집에서 잠을 청했다. 한데 잠이 잘 안 와 친구 집 창문에 윈도우 페인팅을 했다. 지금이야 흔한 게 윈도우 페인팅이지만 말이다. 나난은 그 일로 한국 윈도우 페인팅의 효시가 됐다.

“친구 집 윈도우 페인팅은 삽시간에 퍼졌어요. 하루에 인터뷰가 10개 넘게 잡혔어요.”

그녀는 2000년대 새로운 한 세기를 이끄는 ‘젊은 작가’에 선정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하지만 아파서 버틸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 유언이 늘 일상 속에서 가시처럼 마음에 걸렸고요. 아플 때마다 물었어요. ‘하나님 나 교회에 다니면 안 아프게 해줄 거예요’ 하고요. ‘예전처럼 교회 나갈 테니 고쳐 달라’고 생떼를 부렸어요. 2006년 대성교회에 출석했어요. 아픈 거요? 1주일 만에 나았어요. 자고 일어나니 어느 순간 귀도, 눈도 통증도 싹 없어졌더라고요. 하나님 인도대로 살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렇게 기도가 시작되자 예술관도 변했다. 첫 윈도우 페인터로서 저작권 욕심이 있었던 마음은 사라지고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윈도우 트리’ 캠페인을 벌였다. 크리스마스 때마다 예수 탄생의 기쁨을 위해 수많은 나무가 베어졌고 그 나무마다 화려한 전구를 달았다. 나난은 그것이 마음 아파 윈도우 트리 키트를 만들어 보급했다.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를 윈도우 페인팅 된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예수 탄생 의미를 되돌아보는 것, 그것이 그녀가 원하는 결과였다.

“윈도우 트리 키트를 보급하자 홍콩 세계무역센터에서 저를 불렀어요. 센터 안 백화점 전체를 생명 손상 없는 윈도우 트리로 꾸며 달라는 거였죠. 두 달간 머물며 작업했어요. 홍콩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바꿨다는 평을 받았어요.”

이후 나난은 서울 예술의전당 내 한가람미술관, 런던 영국문화원 등 수많은 곳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또 기도만 하면 꿈이 이뤄졌다. 아티스트로 뉴욕 가고 싶은 열망을 늘 품고 있었는데 교회에서 기도를 마친 후 전봇대에 붙은 ‘뉴욕 31 갤러리’ 영아티스트 공모를 보고 부랴부랴 포트폴리오를 제출했는데 뽑힌 것이다.

그 이후로 그녀는 자신의 재능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임을 알았다. 선물이었다. 이후 ‘한부모 자녀를 위한 모임’ 등 각종 소외 시설에 다니면서 윈도우 트리 작업을 했다.

생명 손상 없는 크리스마스트리 키트 보급

“아버지 앞에 무릎 꿇으면서 창의성이 폭탄처럼 터졌어요. 동물의 이름을 짓는 아담처럼 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내는 작업이었던 거죠. 그의 피조물인 나는 하나님의 무한 축복을 찬양해야지요. 생명의 공간 DMZ 동식물을 그리며 미래세대에게 예수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요.”

그녀의 DMZ 생태 창작 작업은 2013∼2014년 집중됐다. 통일부와 통일문화운동을 이끄는 사회적기업 플랜트리(대표 심태선)의 요청으로 도라산역 등 DMZ 시설과 생태를 둘러보고 관련 문화상품을 살피면서 ‘하염없는 광복 70년, 분단 68년 이후 젊은 세대’에게 어떻게 메시지를 전할까 생각했다.

“성경의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의 분열 원인은 하나님의 지혜와 충고를 거스른 데서 비롯됐잖아요. 르호보암과 같은 위정자가 백성에게 분단이라는 멍에를 지웠어요. 혹여 우리가 그 같은 우를 범하지 않았는가 반성하게 됐어요. 그냥 저는 크리스천 예술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예요. 제 창작물이 올해부터 다양하게 쓰여 분단의 울타리를 걷는 자그마한 힘이 됐으면 합니다.”

나난은 앞서 5일 신년 집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서로 사랑하자’였다. 예수는 생명이므로 사랑하면 생명과 평화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든다고 말했다.

이제 ‘무난한 나난’이 아니라 통일을 외치는 ‘용기 있는 나난’이 시작됐다.

나난

“학력에 대한 뇌구조가 없다”고 말하는 나난은 잡지사 객원기자로 일했다. 우연히 일러스트 작업을 하면서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유목민 아티스트. 창문에 그림을 그리는 윈도 페인터로 뉴욕 31 갤러리 영아티스트에 선정됐고 런던 영국문화원, 홍콩세계무역센터, N서울타워, 신세계백화점 등과 페인팅 작업을 했다. 서울역 공항철도 에스컬레이터 작업으로 2013년 ‘소비자가 뽑은 광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다양한 분야의 일러스트레이터, 디자이너로 활동 중. 지난해 그의 작업 DMZ 안 동식물 세밀화 작업이 올해 통일문화운동으로 활용되며 관련 상품으로도 선보일 예정이다. 서울 이태원동 대성교회 출석.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