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김흥규] ‘뿔라’에 사는 ‘헵시바’

입력 2015-01-09 00:23 수정 2015-01-09 15:38

지난번 우리 교회 성탄축제 때 딸아이가 영어로 촌극을 했다. 아주 잘했기에 내심 흐뭇하게 지켜봤다. 그런데 그날 밤 딸아이가 대뜸 이렇게 물었다.

“아빠, 아까 공연할 때 나를 비웃었지?”

딸아이는 내가 미소 짓는 모습을 보고서는 비웃었다고 오해했던 모양이다. 딸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니 괜스레 아이의 자존감 부족이 염려가 됐다.

길을 가다 낯선 이를 만날 때면 미소를 보내는 사람이 있다. 자긍심이 높은 사람은 선한 인사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신을 비웃는다며 기분 나쁘게 여긴다.

종합편성채널이 여러 개 등장한 이래 작금의 시사보도는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것 같다. 붉은 글씨로 큰 자막을 달고 매우 공격적인 보도를 일삼는다. 시청률 경쟁 때문인지 저질스러운 흥미 위주의 보도를 서슴지 않는다. 이들 방송을 통해서는 누군가를 칭찬하는 말을 듣기가 어렵다. 언제나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이런 류의 프로그램을 보는 시청자들의 심성이 긍정적이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한 방에 훅 간 인사들에 대한 시시콜콜한 사생활에나 관심을 기울이다가 타인의 약점이나 슬금슬금 들추는 소인배로 변할까 두렵기까지 하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이면서 동시에 분단 70주년이다. 일제가 우리에게 심어준 식민사관과 열패감을 극복하는 데는 70년도 모자란 것 같다. 제국주의는 늘 압제와 수탈을 교묘하게 정당화한다. 강국의 지배를 받아야 할 만큼 열등하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주입시킨다. ‘밥을 먹여 주는 손가락을 깨물지 말라’는 속담처럼 강자에게 대드는 것은 자해를 자초하는 것이라며 뿌리 깊은 노예의식을 심어준다. 피지배층 사이에 반목과 갈등이 일어나도록 조장해 분열적 식민지 근성도 조장시킨다.

유다 민족이 70년간 바벨론 제국의 포로생활을 마친 후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을 때가 꼭 그랬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는 정체성은 온데간데없었다. 노예백성이라는 부정적 자아상에 깊이 매몰되고 말았다. 돌아온 예루살렘은 사방에 잡풀만 그득한 황성(荒城)이었다.

그런 만큼 유다 민족 개조와 예루살렘 재건은 자긍심 회복에서 출발해야 했다. 부정적 자아를 긍정적 자아로 바꾸어야 했다. 패배감에 젖은 유다에게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헵시바’와 ‘뿔라’(사 62:4)라는 새 이름을 주셨다. 전자는 신랑이 신부에게 ‘나의 기쁨!’이라고 탄성을 지를 때 쓰는 감탄사이며, 후자는 ‘결혼한 여인’이라는 뜻으로 든든한 신랑이 지켜주는 축복의 땅을 의미한다.

유다는 스스로 생각하듯이 ‘아주바’, 즉 ‘버림받은 자’가 아니라 헵시바라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셰마마’, 즉 ‘황무지’가 아니라 남편이 보호해주는 여인처럼 안전한 땅이라는 것이다. 여기엔 헵시바인 유다 백성이 뿔라인 예루살렘에 거주한다는 긍정과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유다가 70년 포로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던 것처럼, 금년에는 ‘38선 철의 장막’이 무너지고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통일을 이루기 위해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우리의 부정적 자아상을 바꾸는 것에 있다. 이 나라 대한민국이 셰마마가 아니라 뿔라요, 우리 한민족이 아주바가 아닌 헵시바라는 사실을 긍정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또 한 번 집단적 자기비하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이때 우리 모두 뿔라에 사는 헵시바인 것을 자각하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김흥규(내리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