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성의 가스펠 로드] (38) 예수를 사랑한 남자, 얀 후스 - 체코 프라하 광장에서

입력 2015-01-10 00:11
프라하 광장 중심에 서 있는 종교개혁가 얀 후스 동상.

2011년 9월 교교한 달빛 아래 잔잔히 흐르는 몰다우강에서 나는 건너편에 위치한 숨 막히는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비투스 대성당을 보기 위해 카를교를 건넜다. 뭐라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아름답고, 또 아름다웠다. 몰다우강을 따라 걷다 사색에 잠기기를 여러 번, 쉬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다시 광장으로 돌아왔을 땐 비로소 내가 프라하에 온 명확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진실만을 찾아라. 진실만을 들어라. 진실만을 배워라. 진실만을 사랑하라. 진실만을 말하라. 진실만을 지켜라. 죽음을 두려워 말고 진실만을 사수하라.”

조금 까칠해져 보겠다. 강대상에서 선포하는 말씀이나 무대에서 부르는 찬양에선 말이다. 누구나 하나님께 목숨까지 내어 드리고 그의 길을 따른다고 설교하고 찬양하고 아멘으로 화답한다. 십자가의 삶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위한 분별되고 거룩한 헌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기독교 역사에서 멀게는 신사 참배 운동, 가깝게는 최근 잇따라 일어나는 일련의 치부들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도, 브레이크도 없이 자행되고 있다. 크리스천 청년으로서 그런 부조리함을 보며 울컥함과 무력함이 있었던 걸까.

나는 얀 후스를 보았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목숨까지 내어 던질 정도로 진리를 수호하고, 예수를 사랑했는지 뜨겁게 묵상해 보고 싶었다. 당시 최고 권력층이었던 교황청을 상대로 감히 면죄부 건을 비판하던 그의 경건한 올곧음은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철저한 믿음에서부터 출발했다.

사실 그는 꽤나 잘나가는 학자였다. 명문 사학으로 일컬어지는 프라하대학에서 만 30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철학부 학장을 역임했으며 37세 나이에 총장에 올랐으니 시대의 부조리함에 눈을 감고 교회와 적당히 타협을 하면 얼마든지 부와 명예를 지키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혼탁한 시대를 밝혀줄 촛불로 그를 쓰셨다. 부패한 중세 교회를 향한 준열한 일갈을 날린 옥스퍼드대학 교수 위클리프의 글이 그의 심장을 뛰게 했다.

1414년, 그는 독일 남부 콘스탄츠에서 열리는 종교 회의에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길 원했다. 그러나 기득권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으려는 종교 장사치들은 들판에서 그의 설교를 듣고 감동받은 대중의 바람을 뒤로 하고 후스를 감옥에 투옥시켰다. 이제 그에게 강요된 것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서슬 퍼런 협박뿐이었다.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신념을 번복하고 권력의 앞잡이가 된다면 얼마든지 풀려날 수 있었다. 감옥에서 죽음의 공포와 맞닥뜨려야 했던 그는 입을 열었다. ‘성경대로 논합시다.’ 그것이 그를 화형에 처하게 했다.

당시 성경에 무지한 대중들에게 보헤미아어로 설교하고, 라틴어로 ‘교회론(De ecclesia)’을 쓰는 등 얀 후스는 성경과 교회가 특정한 계층의 전유물로 귀속되는 것을 반대했다. 모든 것은 하나님 편에 세워져 있어야 하고, 대중에게 나눠져야 함이 마땅하다고 여겼다.

얀 후스는 체코말로 ‘거위’란 뜻이다. 그가 화형당할 적에 “너희가 지금 거위를 불태워 죽이지만 100년 뒤 나타난 백조는 어쩌지 못할 것”이란 말을 했다고 한다. 마르틴 루터의 등장을 예언했다는 설이 있다. 위클리프에서 얀 후스, 그리고 다시 마르틴 루터로 이어지는 믿음의 삼각 편대는 프로테스탄트 태동의 시초라 볼 수 있겠다.

한국 교회의 심각한 위기는 급속한 현재 진행형이다. 뼈저린 책임감을 가져야 할 몇몇 교계 지도자들의 권력에 눈먼 무책임한 태도와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 해이는 후스나 루터의 시대와 꼭 닮았다. 흑암의 거짓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영혼들에 대한 사랑 찾기를 기도하며 목숨까지 내건 얀 후스가 우리 시대에 경종을 울린다. 내게도 그렇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의 무거움이 한국 교회에 거룩한 도전이 되기를 바란다.

문종성(작가·vision-mat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