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인사이드] 3년 전 실직… 생활고·주식투자 실패하자 극단 행동

입력 2015-01-07 04:13
경찰관들이 6일 오전 세 모녀 시신이 발견된 서울 서초동 한 아파트에 폴리스라인을 두른 채 현장조사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서초동 세 모녀 살해 사건의 용의자인 강모씨가 6일 오후 경북 문경시 농암면에서 경찰에 체포된 뒤 서초경찰서로 이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6일 오전 6시28분 119 종합상황실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넋이 나간 목소리의 강모(48)씨는 “아내와 아이들을 죽였고, 나도 죽으려고 나왔다”며 “서울 서초구 ○○○아파트 ○○○동 ○○○호로 가면 시신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발신지는 충북 청주였다.

오전 6시31분. 경찰이 이 아파트에 들이닥쳤다. 현장은 참혹했다. 거실 바닥에는 강씨의 아내 이모(43)씨가, 작은방 바닥과 안방 침대에는 큰딸(13)과 작은딸(8)이 각각 목이 졸려 숨진 채 쓰러져 있었다. 현장에서 발견된 공책 2장짜리 유서에는 “미안해 여보, 미안해. ○○아, 천국으로 잘 가렴. 아빠는 지옥에서 죗값을 치를게”라고 적혀 있었다.

◇고급 아파트 일가족에게 무슨 일이=이 시각 강씨는 자신의 혼다 어코드 승용차를 몰고 청주를 지나 경북 문경으로 내달렸다. 그는 문경의 한 마을에서 도주 6시간여 만에 붙잡혔다. 경찰은 범행 동기로 일단 생활고를 지목했다. 하지만 어린 두 딸까지 살해한 이유로 보기엔 뭔가 석연치 않았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이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강씨 가족은 2004년 여름에 이사 왔다. 강씨 소유의 이 아파트는 146㎡ 규모로 전세가가 7억∼9억원, 매매가는 11억원을 넘는다. 10년이나 살았지만 주민들과는 별 왕래가 없었다. 이웃들은 강씨 가족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고 입을 모았다. 윗집 주민은 “바로 아래위층에 사는데도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반상회 등 주민 모임에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강씨는 아이를 집 근처 유명 공립초등학교에 보냈다. 판·검사 자녀들이 많이 다녀 강남 학군 중에도 최고라고 손꼽히는 곳이다. 한 주민은 “아이를 이 학교에 보내기 위해 젊은 부부들이 많이 이사 온다”고 덧붙였다.

◇범행 동기는 ‘실직 스트레스’와 생활고=경찰에 따르면 강씨는 3년 전 컴퓨터 관련 회사에서 실직한 뒤 별다른 직업 없이 지냈다. 40대의 나이에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아내 이씨도 직업이 없었다. 가끔 본가의 도움을 받아 생활을 이어왔다.

2012년 11월 결국 동네 외국계 은행을 찾아 집을 담보로 5억원을 빌렸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이 중 2년간 생활비로 1억원을 썼고, 2억7000만원은 주식으로 날렸다”고 털어놨다. 남은 돈은 1억3000만원뿐이었다.

강씨는 실직한 뒤 한동안 지인들의 사무실을 드나들었다. 아이들은 아빠가 직장을 잃은 사실을 몰랐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자 그는 남부터미널 근처 고시원을 빌렸다. 최근 1년여 동안 고시원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주식투자를 했다고 한다.

경찰 관계자는 범행 동기에 대해 “가족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라며 “나이 때문에 재취업도 힘든데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다 어려워지니 실직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하고 범행을 저지른 것 같다”고 분석했다. 강씨의 친인척들은 왜 극단적 행동을 저질렀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반나절 만에 끝난 도주극=경찰은 이날 오후 12시10분쯤 문경 농암면 도로에서 강씨를 검거했다. 수배령이 내려진 강씨 승용차를 맞닥뜨린 농암파출소 순찰차가 급히 차를 돌렸고 1㎞가량 뒤쫓다 강씨 차를 앞질러 가로막았다.

검거 당시 강씨는 녹색 라운드 티셔츠와 검정색 운동복 바지 차림으로 체념한 표정이었다고 한다. 저항도 하지 않았다. 범행 직후 정신없이 차를 몰아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까지 왔는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검거된 장소가 어딘지도 모를 정도였다. 농암파출소 관계자는 “강씨가 혼자 ‘죽어야 된다’고 말하기에 담배 한 대 물려주며 타일렀다”면서 “검거 당시 바지가 젖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인근 호수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미수에 그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손목에 자해를 시도한 흔적도 발견됐다.

강씨는 체포 직후 경찰에서 가족을 모두 목 졸라 죽인 사실을 시인했다. “가족과 함께 죽으려 했다”고도 진술했다. 그는 이날 오후 4시50분쯤 서초경찰서로 압송됐다. 경찰 관계자는 “범행 사실을 스스로 신고하는 등 정황을 감안하면 계획적 측면과 우발적 측면이 반반으로 보인다”고 했다. 경찰은 7일 강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시신을 정밀 부검하기로 했다.

정부경 황인호 양민철 임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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