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모에 홀렸나, 거짓 재산에 속았나… ‘팜므 파탈’에 놀아난 지도층

입력 2015-01-07 03:09

국세청 공무원 출신인 세무사 A씨(60)는 2012년 서울의 한 사립대 최고경영자 과정에서 만난 지인을 통해 하모(51·여)씨를 소개받았다. 명품으로 치장한 차림에 나이보다 앳된 호감형 외모였고, 의류 유통업을 하는 2000억원대 자산가라고 했다. 서울 도곡동에 있는 고급 주상복합오피스텔 최고층의 115평 펜트하우스에 살며 벤틀리 승용차를 몰았다. A씨는 알고 지내던 사업가 B씨(52)에게도 하씨를 소개했다.

A씨는 수시로 하씨의 펜트하우스를 드나들며 친분을 쌓았다. 매매가가 30억원을 웃도는 이 집은 대리석 등 고급 마감재와 수입가구, 월풀 욕조 등 최첨단 시설을 갖췄고, 고풍스러운 도자기와 세련된 미술품으로 장식돼 있었다. 옥상 정원에선 매봉산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자주 만나며 가까워지자 하씨는 사업 얘기를 꺼냈다. 그는 “재고 의류를 구입해 해외에 팔면 갑절 이상 수익을 거둘 수 있다. 돈을 빌려주면 한 달 뒤 10% 이자를 붙여 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A씨는 하씨의 호화로운 생활을 가까이서 지켜본 터라 흔쾌히 돈을 건넸다.

그러나 정해진 날이 지나도록 하씨는 A씨에게 원금과 이자를 돌려주지 않았다. 오히려 돈을 더 빌려가기만 했다. A씨가 2012년 12월부터 지난해 5월까지 하씨에게 건넨 돈은 32억8000만원에 달했다.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 무렵 A씨는 하씨가 같은 방식으로 B씨에게도 접근한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B씨 역시 하씨에게 5억6000만원을 건넸다고 했다.

허겁지겁 그녀의 정체를 알아본 두 사람은 경악했다. 하씨는 신용불량자였다. 오래전 의류 ‘땡처리’ 관련 일을 한 적은 있지만 의류 유통업을 하는 자산가란 소개는 완벽한 거짓이었다. 여기저기 예명을 쓰고 다녔다. 펜트하우스는 1000만원짜리 월세였고 벤틀리 승용차 역시 렌트한 거였다. 하씨는 두 사람에게 빌린 돈을 이런 사치 생활을 유지하고 빚을 갚는 데 대부분 탕진한 상태였다. 이웃들 사이엔 하씨가 집으로 남자들을 끌어들이는 사기꾼이라는 소문까지 나 있었다.

A씨는 지난해 가을 하씨를 사기 혐의로 서울 수서경찰서에 고소했다. 하씨는 수사가 시작되자 잠적했다가 지난달 29일 경기도 김포의 친척집 인근에서 잠복 중인 경찰에 붙잡혀 구속 수사를 받고 있다. 수년 전에도 같은 수법으로 사기 행각을 벌여 수배됐다가 피해자와 합의해 무마된 것으로 드러났다. A씨에게도 “1억원이라도 돌려줄 테니 합의하자”고 요구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씨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피해자는 A씨와 B씨 외에 더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위 관료와 지방자치단체장을 비롯해 연예인까지 하씨의 펜트하우스를 ‘사랑방’처럼 드나들었다고 한다. 피해를 본 남성 대다수가 사회적 신분 때문에 고소하지 않거나 피해액 일부를 돌려받고 합의해 준 것으로 전해졌다. 하씨의 지인은 “일부 인사들은 하씨와 교제하거나 끈질기게 구애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경찰은 하씨를 상대로 여죄를 추궁하고 있다.

전수민 임지훈 기자 suminis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