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오전 6시28분 119 종합상황실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넋이 나간 목소리의 강모(48)씨는 “아내와 아이들을 죽였고, 나도 죽으려고 나왔다”며 “서울 서초구 ○○○아파트 ○○○동 ○○○호로 가면 시신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발신지는 충북 청주였다.
오전 6시31분. 연락을 받은 경찰이 이 아파트에 들이닥쳤다. 현장은 참혹했다. 거실 바닥에는 강씨의 아내 이모(43)씨가, 작은방 바닥과 안방 침대에는 큰딸(13)과 작은딸(8)이 각각 목이 졸려 숨진 채 쓰러져 있었다. 현장에서 발견된 공책 2장짜리 유서에는 “미안해 여보, 미안해. ○○아, 천국으로 잘 가렴. 아빠는 지옥에서 죗값을 치를게”라고 적혀 있었다.
◇고급 아파트 일가족에게 무슨 일이=이 시각 강씨는 자신의 혼다 어코드 승용차를 몰고 청주를 지나 경북 문경으로 내달렸다. 그는 문경의 한 마을에서 도주 6시간여 만에 붙잡혔다. 경찰은 범행 동기로 일단 생활고를 지목했다. 하지만 어린 두 딸까지 살해한 이유로 보기엔 뭔가 석연치 않았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이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강씨 가족은 이 아파트에 2004년 여름 이사 왔다. 10년이나 살았지만 주민들과는 별 왕래가 없었다. 이웃들은 강씨 가족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고 입을 모았다. 윗집 주민은 “바로 아래위층에 사는 데도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같은 동 다른 주민 역시 “여자가 아침 일찍 아이들 학교 보내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말을 섞어본 적은 없다”고 전했다. 반상회 등 주민 모임에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인근 세탁소 주인 A씨도 “이 아파트 주민을 거의 다 아는데 이 집은 기억에 없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씨는 아이를 인근 유명 공립초등학교에 보냈다. 판·검사 자녀들이 많이 다녀 강남 학군 중에도 최고라고 손꼽히는 곳이다. 한 주민은 “아이를 이 학교에 보내기 위해 젊은 부부들이 많이 이사 온다”고 덧붙였다.
◇범행 동기는?=경찰에 따르면 강씨는 3년 전 컴퓨터 관련 회사에서 실직한 뒤 별 직업 없이 지냈다. 아내 이씨도 직장에 다니지 않았다. 가끔 본가의 도움을 받아 생활을 이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강씨가 실직 후 생활고에 시달린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강씨 소유의 이 집은 146㎡로 전세가가 7억∼9억원, 매매가는 11억원을 넘는다. 고가의 아파트를 갖고 있으면서 생활고를 겪었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인근 부동산 관계자들은 “강씨가 집을 내놓은 적도 없다”고 했다.
강씨가 부동산값 폭락으로 큰 손해를 봤다는 추측도 나온다. 실제로 2003년 완공된 이 아파트는 국토교통부 아파트 실거래가 기준으로 2006년 13억∼16억원대에 거래됐다. 집은 강씨의 마지막 보루였을까. 2012년 11월 그는 결국 동네 외국계 은행을 찾아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 현재 강씨 집에는 채권 최고액 6억원의 근저당권이 설정돼 있다. 5억원 안팎을 빌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시기 극단적인 경제난에 부딪혔거나 투자나 사업을 시도했을 수도 있다. 강씨가 추가로 신용대출을 받거나 사채를 썼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반나절 만에 끝난 도주극=경찰은 이날 오후 12시10분쯤 문경 농암면 도로에서 강씨를 검거했다. 수배령이 내려진 강씨 승용차를 맞닥뜨린 농암파출소 순찰차가 급히 차를 돌렸고 1㎞가량 뒤쫓다 강씨 차를 앞질러 가로막았다.
검거 당시 강씨는 녹색 라운드 티셔츠와 검정색 운동복 바지 차림으로 체념한 표정이었다고 한다. 저항도 하지 않았다. 농암파출소 관계자는 “강씨가 혼자 ‘죽어야 된다’고 말하기에 담배 한 대 물려주며 타일렀다”면서 “검거 당시 바지가 젖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인근 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미수에 그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강씨는 체포 직후 경찰에서 가족을 모두 목 졸라 죽인 사실을 시인했다. 살해 동기를 수사 중인 경찰은 강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다.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해 7일 시신을 정밀 부검하기로 했다. 세 모녀의 시신이 옮겨진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에는 오후 1시쯤 이씨의 부모와 형제가 비틀거리며 힘겹게 들어왔다. 영안실 밖으로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시신에는 별다른 저항 흔적도 없었다고 해 안타까움을 더했다.
정부경 기자 vicky@kmib.co.kr
[사건 인사이드] 3년 전 실직 생활고 비관하다 비극적 극단행동 저질렀나
입력 2015-01-07 0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