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정종성] 희망의 다리를 놓으려면

입력 2015-01-07 01:42

새해 첫날에 드리는 우리 가정 추도예배는 금년에도 가족들 간의 오해와 갈등으로 얼룩졌다. 70세가 넘은 누님 권사 부부는 나를 포함한 동생들이 나와서 인사하지 않았다며, 이틀 동안 너무 화가 나서 잠을 못 잤다고 나에게 조목조목 따지며 훈계했다. 형수는 누님이 자신의 딸(나의 조카)과 딸의 남편(조카사위)에게 말을 너무 함부로 했다며, 어떻게 권사가 그럴 수 있냐고 화를 내면서 새벽부터 다섯 통의 전화로 나를 괴롭혔다.

예배에 와야 할 15명이 빠지고 14명의 식구만 참석한 반쪽 추도예배는 이렇게 내 애간장을 녹였다. 살아가는 원칙들이 서로 분명하게 드러나고 충돌하면서, 나는 매년 행사가 끝날 때마다 적지 않은 경비부담뿐만 아니라 간과 쓸개가 모두 녹아 없어져 버린 것 같은 허전함에 시달린다.

그러다 문득, 한 부모 밑에서 나온 자식들이 이럴진대, 거대한 국가라는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는 어떨 것이며, 나아가 서로 적대시하며 남남으로 살아온 남한과 북한 사이의 냉랭함이 과연 어떠할지, 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반가운 것은 ‘광복·분단 70년’을 맞아 남북한 지도자 모두 통일에 대한 희망과 포부를 강하게 밝히고 나섰다는 점이다. 지난 1일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정상회담까지 포함해 남북대화에 적극 나서겠다고 포부를 밝혔고, 그 이틀 전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위원장으로 있는 통일준비위원회가 1월 중 남북대화를 하자고 제안했다. 남북한 사이에 진정한 대화의 물꼬가 다시 터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나의 기대감은 독일 통일의 주역인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수상의 ‘접촉’과 ‘대화’에 우선 가치를 둔 동방정책으로 이어졌다. 서로 적대적이고 상극인 한 민족, 두 국가체제가 한순간 모든 것을 없는 것으로 돌려버릴 만큼 그렇게 뜨거웠던 사랑의 결속력은, 사실 더 많은 세월 서로를 없는 것처럼 배척하고 무시해왔던 증오의 거리감으로 존재해왔다. 그 무시무시한 증오의 벽을 뚫고 희미하게나마 희망의 다리를 조금씩 놓기 시작한 것은 바로 서독 정부가 간과 쓸개를 다 내놓고서라도 결코 양보하지 않았던 접촉과 대화라는 일관된 원칙이었다.

서로 불편한 관계 속에서 대화의 진정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소통의 원칙은 과연 무엇일까.

‘성육신’이 그 해답이다. 하나님의 ‘동방정책’인 성육신 모델은 우선 상대방(북한)의 준거틀(frame of reference)을 존중하면서 그 안에서 대화하고자 하는 노력이 핵심이다. 사실 100% 완벽한 소통과 대화를 위해서라면 상대방의 준거틀을 100%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롬 14:1).

그리고 어떤 경우라도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 의심하는 대신 믿는 것이다. 그러한 인격적 대우가 상대방에게 감동을 일으켰을 때, 쌍방은 형식이나 고정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점차 본질을 향해 자유하게 된다. 또한 진정한 소통은 성육신처럼 상대방과 자신을 ‘동일시’할 때 가능하다. 동일시의 진정성은 상대방의 가슴을 열게 한다.

그런데 성육신 모델을 적용할 때면 간과 쓸개를 모두 내주는 것 같은 저자세와 무원칙, 그리고 일방적인 ‘퍼주기’라는 비난에 휩싸이게 된다. 누구나 필연적으로 맞닥뜨리는 문제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체’이지만 ‘종의 형체’인 인간과 동일시했던 예수 그리스도(빌 2:6∼7)는 자신이 아버지의 희생양이 아니라 구원사역에 대한 당당한 주인의식을 가졌기에 기꺼이 인간의 몸으로 십자가에 오르셨다(요 10:18). 그래서 온 천하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주(Lord)”라는 영광의 고백을 하게 되었다(빌 2:10∼11). 온갖 비난 속에서도 희망의 다리를 놓을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주인의식이다.

정종성 교수(백석대 기독교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