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의 빛’ 새해를 열다

입력 2015-01-08 01:40 수정 2015-01-08 10:26

울릉도가 바닷속에서 솟아난 날도 이런 조화를 부렸을까? 유화보다 거친 질감의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순식간에 울릉도의 하늘과 바다 사이를 막아선다. 이어 무대의 막이 올라가듯 수평선이 서서히 열린다. 태하등대 동백꽃보다 붉은 띠가 동해 수평선을 수놓는다. 기다렸다는 듯 먹구름 사이로 틈이 열리고 황금색 햇살이 부챗살처럼 쏟아진다. 평화와 통합을 희망하는 을미년(乙未年) 새해의 상서로운 빛내림 현상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아주 먼 옛날 깊은 바다에서 화산이 폭발하면서 솟은 울릉도는 태고의 모습이 고스란히 간직된 신비의 섬이다. 독도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된 울릉도는 오각형 모양의 해안이 대부분 절벽으로 이루어져 배를 타면 섬 전체가 철옹성처럼 보인다.

울릉도 여행은 만남의 설렘과 이별의 아쉬움이 뱃고동과 함께 교차하는 도동항에서 시작된다. 도동항은 봄부터 가을까지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북적거리지만 한겨울에는 포항∼울릉도 배편이 풍랑으로 자주 끊겨 한적하다. 그러나 하루 이틀 고립을 감수하고 여유롭게 일정을 짜면 한겨울 울릉도처럼 매력적인 여행지도 드물다.

도동여객선터미널에서 행남등대를 거쳐 저동항 촛대바위를 연결하는 2.6㎞의 해안산책로는 울릉도 초기 화산 활동의 지질 구조가 보존된 지질학 교과서다. 기암절벽 곁을 따라 걷는 해안산책로는 때로는 바다를 건너는 무지개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파도가 넘실거리는 해안산책로에는 해식동굴, 베개용암, 티포니, 재퇴적쇄설암, 이그님브라이트 등이 차례대로 눈을 황홀하게 한다.

도동 해안산책로는 바다를 향해 돌출된 절벽에 가로막혀 행남등대가 위치한 가파른 산을 오른다. 도동등대로도 불리는 행남등대가 첫 불을 밝힌 때는 1979년 6월 23일. 등탑 앞 벼랑은 저동항과 내수전은 물론 죽도와 관음도 등 오각형 울릉도의 동쪽 해안이 두루마리처럼 펼쳐지는 해돋이 명소. 행남등대 가는 길과 연결된 저동 해안산책로도 클링커, 베개용암, 해안폭포, 해식동굴 등을 관찰할 수 있다.

저동항은 울릉도 오징어의 대부분이 취급되는 항구다. 밤새 수평선에서 어화를 밝힌 채 오징어를 잡은 배들이 갈매기와 함께 귀항하면 경매가 진행된다. 이어 아낙들이 경매가 끝난 오징어를 배를 갈라 대꼬챙이에 꿰는 할복 작업을 한다. 저동항 방파제 옆에 서 있는 촛대바위와 저동항 앞바다에 위치한 삼각형 모양의 북저바위도 일출 명소.

울릉도는 옛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길 박물관’이다. 지금은 내수전∼섬목 구간을 제외한 일주도로가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지만 1970년대까지 울릉도 주민들은 성인봉에서 흘러내린 험난한 고갯길을 넘어 다녀야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옛길의 흔적은 많이 사라졌지만 내수전에서 와달리를 거쳐 석포를 연결하는 7㎞에는 옛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깎아지른 해안 절벽과 험한 산세 때문에 원시림으로 변한 옛길에는 섬잣나무, 섬단풍나무 등 울릉도에만 자라는 특산식물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창하다. 한 사람이 걷기에 적당한 옛길은 울창한 숲으로 덮인 산허리를 돌 때마다 오른쪽으로 숲 속에 숨어 있던 동해바다가 숨바꼭질하듯 불쑥불쑥 나타난다. 옛길의 끝에 위치한 석포독도전망대는 울릉도의 3대 비경인 관음도와 죽도, 그리고 북면의 해안절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소다.

내수전에서 섬목에 이르는 해안은 요즘 일주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울릉도를 한바퀴 도는 약 34.3㎞ 길이의 해안도로는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내수전∼섬목 구간에서 길이 끊긴다. 그러나 2018년에 터널 등으로 이루어진 4.3㎞ 구간이 완공되면 자동차를 타고 울릉도를 한 바퀴 돌 수 있어 울릉도 관광이 한 차원 업그레이드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섬목에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보행연도교로 연결된 관음도가 위치하고 있다. 지질명소인 관음도는 독도와 죽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울릉도의 부속섬이다. 연도교를 건너면 후박나무와 동백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고, 전망대에 서면 죽도와 북면 해안, 저동 및 와달리 해안과 더불어 삼선암 등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울릉도 최고의 비경은 대풍감에서 바라본 북면 해안이다. 옛 우산국의 도읍지이자 울릉도 개척령이 내려진 이듬해인 1883년 7월에 54명의 개척민이 첫 발을 내디뎠던 태하리는 관광모노레일의 출발점. 관광모노레일은 총연장 304m로 최대 39도나 되는 가파른 경사를 6분 동안 올라간다. 20인승 카 2대가 레일을 타고 기암과 숲으로 이루어진 산을 오르면 마치 암벽등반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차창 아래로 보이는 희미한 길은 모노레일이 생기기 전 태하등대를 오르내리던 오솔길.

산정에서 태하등대까지 10분 거리로 경사가 완만해 평지나 다름없다. 오솔길은 후박나무 동백나무, 섬개야광나무, 섬고로쇠 등 아름드리 상록수로 어두컴컴하다. 태하등대 못 미쳐 만나는 외딴집은 한때 울창한 향나무 숲을 끼고 있었다는 향목마을.

태하등대는 정식 명칭이 ‘울릉도항로표지관리소’로 1958년에 처음 세워졌다. 등대 입구에서 나무데크를 따라가면 한국의 10대 비경 중 하나인 대풍감 절벽이 나온다. 대풍감(待風坎)은 돛단배가 이곳 바다에서 바람이 불기를 기다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바라만 보아도 아찔한 대풍감의 절벽은 제멋대로 뒤틀리고 구부러진 울릉도 향나무의 자생지(천연기념물 제49호)로 암벽이 칼날처럼 날카롭고 가팔라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 대풍감 전망대(해발 171m)에서 보는 현포항과 송곳산, 그리고 공암은 한 폭의 풍경화. 대풍감 전망대는 해넘이 명소로 억새를 빨갛게 물들이며 수평선과 입맞춤하는 태양이 황홀하다.

울릉도=글·사진 정재호 기자 jhjung@kmib.co.kr

▶ 관련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