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3세의 운명을 가른 건 ‘집단분노’였다. 특정한 주도세력 없이 형성된 국민적 분노는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됐다.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에서 여론을 주도하고 사법처리로 이끈 건 이 분노의 힘이었다. 사정 당국과 사법부 관계자들도 조현아(41·여) 전 대한항공 부사장 구속 과정에 국민적 공분(公憤)이 고려됐다고 증언했다.
사정 당국 관계자는 5일 “서울서부지검 수사팀도 초기에는 조 전 부사장 구속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여론이 심상찮게 돌아가자 수사를 지휘하는 대검찰청이 방향을 잡아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조 전 부사장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발부하지 않았다면 비대해진 집단분노가 검찰과 법원으로 방향을 틀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울서부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굳이 수치화하자면 이런 사건에선 국민 다수의 분노를 10% 정도 고려해 판단한다”고 설명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처음엔 영장 발부를 이례적이라고 봤는데, 집단분노를 더 키울 (조현민 전무의 ‘반드시 복수하겠어’) 문자 메시지 얘기를 듣고 ‘잘 발부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집단분노는 이처럼 사법적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잘못된 관행을 바꿀 정도로 한국사회에서 울림이 크다. 정치권의 개입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집단분노는 갈수록 힘이 커지는 속성을 갖는다. 정치적 목소리가 끼어들면 변질되기 쉬운 약점도 안고 있다. 땅콩 회항 사건은 자연발생적 집단분노의 힘이 발휘된 대표적 사례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란 여론형성 수단이 갖춰진 데다 최근 사회적 논란이 된 갑을 문제와 취업난 등이 맞물리면서 그 파괴력이 커졌다.
이런 사회적 토양에서 형성된 집단분노는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효과를 낳고 사회 변혁의 힘이 돼 왔다. 하지만 자칫 마녀사냥 같은 또 다른 비합리로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도 깊다. 한국사회는 지난해만 해도 세월호 참사, 육군 가혹행위, 통합진보당 해산, 비선실세 국정개입 의혹 등을 두고 끊임없이 집단적으로 분노했다. 그 결집된 힘에 편승하려 정치적 목소리가 끼어들 때 본질이 외면되고 국론이 분열되는 상황도 여러 차례 목격했다.
사회학자들은 집단분노에 양면성이 있다고 말한다. 악습을 고치는 문제제기란 점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유언비어를 동반하고 막무가내로 ‘희생양’을 만드는 집단광기로 흘러가면 부작용이 발생한다.
조 전 부사장이 구치소로 향할 때 많은 사람이 후련해했지만 “과연 구속까지 이를 일인가”하며 고개를 갸우뚱한 이도 적지 않았던 건 이 때문이다. 서울지역의 한 판사는 “국민 전반의 의사인지, 특정 집단의 입장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며 “집단분노에 대한 판단은 늘 딜레마”라고 했다. 수도권의 한 판사는 “국민의 법감정을 따라갈 때는 늘 명과 암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경원 정부경 전수민 양민철 기자neosarim@kmib.co.kr
[기획] ‘비합리’에 저항 ‘화풀이’로 변질… 한국사회 ‘집단분노’ 두 얼굴
입력 2015-01-06 03:26